from 짧은말 2018. 5. 31. 18:39

 

우리 시대 분노의 행방과 영화적 미스테리.

<버닝>과 <쓰리 빌보드>를 중심으로-

 

 

1. "분노하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사라진 분노의 행방

2.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계

3. 미스테리가 된 영화, 영화가 된 미스테리 

 

 

셈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의 분노가 항구적으로 수신되는 상태에 놓인 세계를 생각해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분노를 터트리는, 가히 범람하는 분노의 시대라고 우리의 역사를 정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전되는 분노는 당연하게도 폭력으로 진화된 양상의 분노다. 테러리즘 혹은 묻지마 살인 등 손쉽게 악으로 분류되는 객관적 폭력으로 발전한 분노가, 그리고 "시스템에 분노하라"는 구호 내에서의 이상적인,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하라, 그러나 비폭력적으로."라는 구호의 유효성이 그 정치적 온건함만큼이나 온건하고 재빠르게 퇴장했음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설되지 않은, 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소리없는 아우성같은 분노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채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이 분노를 품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들이 앓았던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분노하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분노에 침식당했는지를, 혹은 자신이 어떤 연유에서 분노라는 감정의 격랑에 휩쓸렸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인식론적 맵을 그리지 못한다. 온갖 식자들은 이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주력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 분노에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곤경이고 미스테리다. 이 분노를 품고 있는 주체들에게는 해결되지 못한 분노를 그냥 흘려보내는 선택과 폭력으로 소진시키는 적극적인 선택이라는 두가지 방안만이 주어졌다. <버닝>의 종수는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자신 안의 분노를 불태운 적극적인 주체이고 <쓰리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이 사라진 분노의 행방을 쫓기를 포기하는 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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