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는, 적어도 독서의 출발점에는 이미 감긴 눈을 생명에 눈뜨게 하려는 비상식적 움직임을 닮은 현기증 나는 그 무엇이 있다. 영감처럼 하나의 도약, 하나의 무한한 도약인 욕망에 관련된 움직임. "

 

 

 

 책에 대하여 논하는 인문서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로 흥행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교양으로 손꼽히는 덕목은 인문학적 지식인바, 명문대 교수가 혹은 자기계발의 대가가 나열하고 요약한 세계의 명저 리스트만 외우고 있어도 시장논리가 좌우하는 우민이라는 대열에서 이탈한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단 몇 권의 책으로도 수백권을 아우를수 있으니 이 얼마나 경제적인 독서인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기회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선호하는 지식인이며 비평가가 읽어야 할 책과 읽지 않아도 될 책을 분류해주니 우리는 독서로부터 너무나 안전한 상황에 놓여있다. 손쉬운 독서에 저항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개인의 인문학적 자기계발이 현대인의 미덕으로 부상하였으므로 우리는 누군가 그에 관해 그토록 고심한 것마냥 독서라는 행위에 대하여 굳이 성찰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그것은 이롭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어떤 이가 "책을 읽어버리면 미치고 맙니다" 따위의 발칙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태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이 올해의 책에 꼽히기까지 하는 영광을 얻는 것은 앞서 말한 양상에 비추어볼 때 짐짓 타당한 결과지만 그 내용물을 들춰보면 이 책이 갖는 도발적인 담론이 그냥 가볍게 무시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다, 타인의 꿈을 꾼다".  요설에 불과한 것 같아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타자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여기에는 어쩌면 광기에 붙들릴지도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독서란 정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미증유의 무의식과 대면하는, 타자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접근이다. 일본의 젊은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시종일관 재기넘치는 문체로 끊임없이 읽는다는 행위를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호한 경고를 인용하는 것으로 단숨에 책과의 결투장으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책을 읽는 한, 모험은 계속된다.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 문학

 

언젠가부터 문학의 안위를 예측하는 태도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규명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문학의 공간은 사상의 각축장이 되었다. 심드렁하게 문학이 끝났다고 천명하던가, 문학의 죽음은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에둘러 변명하는 식의 주장이 횡행했다. 이에 관해 사사키 아타루는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견을 내놓는다. 그는 문학에 대한 종말론적 선고를 비웃으며 차라리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우회하여 문학을 구제하도록 한다. 문학의 기원을 쫓는 그의 숨가쁜 추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전에 이르는데,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란 정의를 도출하게 된다. 성서를 읽은 루터, 그의 표현을 빌어 '문학'의 사람인 루터에게 영향을 받은 법학자들이 실정법을 성문화한 법의 혁명이라는 용례를 들어가며 비호하는 문학이란 법과 제도 그리고 규범에 관련한 총체적인 텍스트이며 여기에는 혁명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의 혁명에 대한 그의 단언은 물론 옳다. 푸코와 르장드르의 세례를 받은 종교와 법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문학이 내포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발명해내는 그의 논리는 다소 비약적이고 관념적일지라도 일견 타당하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창시, 중세 해석자 혁명은 문학이 어떻게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가를, 혁명의 유전자 지도를 그려나가는 문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의식을 규정하는 언어의 물질성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 그 원대한 기획의 혁명적 비전이 역사의 닫힌 공간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사사키 아타루가 열정적인 태도로 문학의 혁명에 대하여 진술할 때, 결연히 그 자태를 드러내는 이가 있다. 이 그림자를 사사키 아타루가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통치성 이론으로 혁명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인지는 아 수 없으나 어쨋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쓰기는 단지 제도와 체제에 관한 주석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이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역사의 본질과 법칙을 규명해낸 가장 혁명적인 글쓰기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단 몇권의 책으로부터 근현대사의 모든 이념이 발아하였다. 이 책은 때로는 폭력의 외피를 둘러쓰고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언가를 잉태하기도, 이 불길이 잠시 타올랐다가 사그라들었음에도 여전히 세계와 역사의 충실한 해석자로 남았다. 르장드르가 예고한대로, 사회의 규범을 정의하는 텍스트의 혁명이었던 중세 해석자 혁명은 통치의 정보화라는 부정적 효과로서 작동하였으며 이는 무조건적인 정보의 개방 속에 주체를 부유하게 하는 폭력적 상황을 견인하는 계기 또한 마련하였다.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성급하게도 통치의 정보화의 반동적 효과로서 과격주의적 폭력 사태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발딛고 있는 공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는 비판이다. 우리의 가장 급박한 문제는 과거의 과오로 인해 더이상 혁명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예외상태'를 추인하는 것은 차라리 너무나 많은 정보와 이 정보권력과 결부된 구조적 폭력의 식별이 불가능하게 된 자본주의의 세계이지, 일련의 이념적 상황들이 야기한 과거의 오명으로 모든 문제를 소급하는 것은 정작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과 기획들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할 뿐이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판독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유혈사태가 봉기하도록 한 그 책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다. 역사의 상처는 그 상처를 낸 창을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을 말하지 않기  

 

이 책의 가장 낭만적인 구절은 끝없이 지속될 문학의 가능성을 언급할 때가 아닐까? 그게 단지 인류 문명의 역사가 앞으로도 380만년은 계속될 것이며 예술의 불씨 또한 380만년간 꺼지지 않을 거라는,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근거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우리는 저 예술에 관한 다원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미래지향적 태도가 지시하고 있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모든 우려들, 예술의 종언을 앞당기는 저 지긋지긋한 선언들이 감지하고 있는 것들, 점점 사회의 적대와 모순과 예술이 괴리되고 있다는 어떤 모종의 징후들이 그저 자신의 대에서 세계가 끝나는 것을 보고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측정한 범주의 문학이라면 물론 문학은 계속해서 설계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또한 끊임없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현재의 문학이 혁명적이기 위해서는 그 언어 안에 세계가 기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온갖 거짓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세계 없음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발돋움하기 위하여 현재의 언어에 혁명을 박아넣어야 할 것이다. 영원을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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