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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2 2013.02.15
  8.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것은 혁명의 문법이다 2013.01.15
  9. nyc 2012.11.14
  10. . 2012.09.11

from 짧은말 2018. 5. 31. 18:39

 

우리 시대 분노의 행방과 영화적 미스테리.

<버닝>과 <쓰리 빌보드>를 중심으로-

 

 

1. "분노하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사라진 분노의 행방

2.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계

3. 미스테리가 된 영화, 영화가 된 미스테리 

 

 

셈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의 분노가 항구적으로 수신되는 상태에 놓인 세계를 생각해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분노를 터트리는, 가히 범람하는 분노의 시대라고 우리의 역사를 정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전되는 분노는 당연하게도 폭력으로 진화된 양상의 분노다. 테러리즘 혹은 묻지마 살인 등 손쉽게 악으로 분류되는 객관적 폭력으로 발전한 분노가, 그리고 "시스템에 분노하라"는 구호 내에서의 이상적인,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하라, 그러나 비폭력적으로."라는 구호의 유효성이 그 정치적 온건함만큼이나 온건하고 재빠르게 퇴장했음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설되지 않은, 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소리없는 아우성같은 분노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채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이 분노를 품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들이 앓았던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분노하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분노에 침식당했는지를, 혹은 자신이 어떤 연유에서 분노라는 감정의 격랑에 휩쓸렸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인식론적 맵을 그리지 못한다. 온갖 식자들은 이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주력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 분노에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곤경이고 미스테리다. 이 분노를 품고 있는 주체들에게는 해결되지 못한 분노를 그냥 흘려보내는 선택과 폭력으로 소진시키는 적극적인 선택이라는 두가지 방안만이 주어졌다. <버닝>의 종수는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자신 안의 분노를 불태운 적극적인 주체이고 <쓰리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이 사라진 분노의 행방을 쫓기를 포기하는 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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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12

from 짧은말 2016. 8. 12. 16:55


Bon iver - The Wolves(The place beyond the pines ost)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will mark you

Harness your blame

Harness your blame, walk through


With the wild wolves around you

In the morning, I'll call you

Send it farther on


Solace my game

Solace my game, it stars you

Swing wide your crane

Swing wide your crane
and run me through


And the story's all over

In the morning, I'll call you

Can't you find a clue

When your eyes are all
painted Sinatra blue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Ah, ah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my pain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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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from 짧은말 2013. 10. 2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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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3. 9. 24. 02:53



-살아있다는 그 느낌 하나만을 위해서 이런저런 무모한 짓들을 감행하는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면 이런 상태는 얼마나 감각을 잃어야만 가능한 것일까? 그 어떤 노력 없이도 나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창밖으로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올 때, 도처에서 누군가가 이 전쟁같은 삶과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 때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결별하는 중인가? 


-나는 그가 몰락하는 현대의 파우스트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월터 화이트는 파우스트의 곤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곧 자기 자신이 메피스토펠레스가 된 인간이 아닐까? 구원의 동앗줄이란 가능성은 가족이 그를 떠남으로써 완전히 소멸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극단에 서는 것 뿐이다. 이 모든 비극을 위해 육년이란 시간을 분투한 딱 그만큼 장렬하게 당신의 인생을 마감하기를. 그 어떤 어설픈 소설들이 구현하지 못하는 보편성을 드라마라는 매체를 통해 승화시킨 빈스 길리건에게 경배를. 시나리오, 호흡, 연출, 주연들의 신들린 연기. 이만큼 철저히 계산된 완벽한 드라마가 다시 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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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3. 9. 13. 01:42



-난데없는 가을 장마. 눅눅하다. 



-모든 사회화와 인정투쟁은 악셀 호네트의 주장대로 너무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맴돈다. 정확히는 악셀 호네트가 그러하듯 인정투쟁에서 헤겔적 저항의 힘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에 실패했을때 출현하는 부정성의 폭력적 형태에 대한 생각이다. 사실은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경제나 욕망, 성이 아니라 인정투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 한국사회는 이같은 울분으로 가득차있다. 나 자신 또한 그렇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테제는 인간에게 가혹한 측면이 있다. "자신의 시대를 앞설 수는 없다". 이런 헤겔적 원환에 반대하며 마르크스보다 헤겔로 돌아가자라는 지젝의 주장은 물론 타당하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도래할 새로운 미래의 급진적인 공간을 열어젖히는 것. 파국의 디스토피아를 더이상 참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디스토피아다. 수년전에 역사가 종결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루하루 단지 살기위하여 치열하게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을 강권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이 먹물들의 언어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이 신세계적 질서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견디고 견뎌라.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좆같은 자유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것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예전에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는 영원한 인류의 과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회가 낳은 병리적 정신질환과 싸우는 것 뿐이다. 엎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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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83 in NYC

from 도시의 산책자 2013. 4. 7. 23:35

 

 

 

 

 

 

 

 

 

M83 in NYC. 201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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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3. 2. 15. 19:50

 

 

 

 

 

1. 더 이상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말들이 이내 범람하고 만다. 오늘날 비평가랍시고 펜대를 놀리거나, 책과 인문학이 소비되는 풍토에 관한 인상적이고  개인적인 몇 구절을 읊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려는 이들의 비윤리적인 태도를 비판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비평은 사장되었다. 인문학은 신자유주의체제에 걸맞춰 상품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가끔 이런 태세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는다. 인문학의 컨텐츠화에 대한 탈경제적인 저항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토로한다. 모든 것이 경제 지수로 환원되어 사고되는 시대의 헤게모니로부터 인문학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언어를 논하고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는 작업은 과연 인류 역사의 이행을 추동하였던 보이지 않는 실재인 경제와 본질적으로 유리되어 있는 인간 고유의 무엇인가? 인문학을 세우는 일, 이론은 어떤 형식으로든 역사와 관계맺어 왔다. 이 관계맺음의 방식이 바로 경제다. 주어진 사회경제적 입장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옳은가? 자본주의가 인문학을 몰아냈으며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다고 탄식을 내뱉을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물신화된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먼저다. 저항은 차라리 가장 경제적인 것의 한복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 죽음충동에 대하여 사실 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버티고 또 버티는 수 밖에. 단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원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서만 내가 딛고 있는 땅의 견고함을 느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확실히 말하건대, 너는 재앙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떠나 고립된 외계의 도시에 나혼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스마트 기기와 sns는 타자와의 모든 거리를 사실상 소거해버림으로써 인간을 고독의 굴레 속에 가둬놓았다. 언제든 발신은 가능하지만 수신의 항구적인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절망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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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는, 적어도 독서의 출발점에는 이미 감긴 눈을 생명에 눈뜨게 하려는 비상식적 움직임을 닮은 현기증 나는 그 무엇이 있다. 영감처럼 하나의 도약, 하나의 무한한 도약인 욕망에 관련된 움직임. "

 

 

 

 책에 대하여 논하는 인문서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로 흥행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교양으로 손꼽히는 덕목은 인문학적 지식인바, 명문대 교수가 혹은 자기계발의 대가가 나열하고 요약한 세계의 명저 리스트만 외우고 있어도 시장논리가 좌우하는 우민이라는 대열에서 이탈한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단 몇 권의 책으로도 수백권을 아우를수 있으니 이 얼마나 경제적인 독서인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기회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선호하는 지식인이며 비평가가 읽어야 할 책과 읽지 않아도 될 책을 분류해주니 우리는 독서로부터 너무나 안전한 상황에 놓여있다. 손쉬운 독서에 저항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개인의 인문학적 자기계발이 현대인의 미덕으로 부상하였으므로 우리는 누군가 그에 관해 그토록 고심한 것마냥 독서라는 행위에 대하여 굳이 성찰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그것은 이롭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어떤 이가 "책을 읽어버리면 미치고 맙니다" 따위의 발칙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태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이 올해의 책에 꼽히기까지 하는 영광을 얻는 것은 앞서 말한 양상에 비추어볼 때 짐짓 타당한 결과지만 그 내용물을 들춰보면 이 책이 갖는 도발적인 담론이 그냥 가볍게 무시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다, 타인의 꿈을 꾼다".  요설에 불과한 것 같아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타자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여기에는 어쩌면 광기에 붙들릴지도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독서란 정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미증유의 무의식과 대면하는, 타자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접근이다. 일본의 젊은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시종일관 재기넘치는 문체로 끊임없이 읽는다는 행위를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호한 경고를 인용하는 것으로 단숨에 책과의 결투장으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책을 읽는 한, 모험은 계속된다.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 문학

 

언젠가부터 문학의 안위를 예측하는 태도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규명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문학의 공간은 사상의 각축장이 되었다. 심드렁하게 문학이 끝났다고 천명하던가, 문학의 죽음은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에둘러 변명하는 식의 주장이 횡행했다. 이에 관해 사사키 아타루는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견을 내놓는다. 그는 문학에 대한 종말론적 선고를 비웃으며 차라리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우회하여 문학을 구제하도록 한다. 문학의 기원을 쫓는 그의 숨가쁜 추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전에 이르는데,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란 정의를 도출하게 된다. 성서를 읽은 루터, 그의 표현을 빌어 '문학'의 사람인 루터에게 영향을 받은 법학자들이 실정법을 성문화한 법의 혁명이라는 용례를 들어가며 비호하는 문학이란 법과 제도 그리고 규범에 관련한 총체적인 텍스트이며 여기에는 혁명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의 혁명에 대한 그의 단언은 물론 옳다. 푸코와 르장드르의 세례를 받은 종교와 법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문학이 내포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발명해내는 그의 논리는 다소 비약적이고 관념적일지라도 일견 타당하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창시, 중세 해석자 혁명은 문학이 어떻게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가를, 혁명의 유전자 지도를 그려나가는 문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의식을 규정하는 언어의 물질성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 그 원대한 기획의 혁명적 비전이 역사의 닫힌 공간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사사키 아타루가 열정적인 태도로 문학의 혁명에 대하여 진술할 때, 결연히 그 자태를 드러내는 이가 있다. 이 그림자를 사사키 아타루가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통치성 이론으로 혁명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인지는 아 수 없으나 어쨋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쓰기는 단지 제도와 체제에 관한 주석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이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역사의 본질과 법칙을 규명해낸 가장 혁명적인 글쓰기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단 몇권의 책으로부터 근현대사의 모든 이념이 발아하였다. 이 책은 때로는 폭력의 외피를 둘러쓰고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언가를 잉태하기도, 이 불길이 잠시 타올랐다가 사그라들었음에도 여전히 세계와 역사의 충실한 해석자로 남았다. 르장드르가 예고한대로, 사회의 규범을 정의하는 텍스트의 혁명이었던 중세 해석자 혁명은 통치의 정보화라는 부정적 효과로서 작동하였으며 이는 무조건적인 정보의 개방 속에 주체를 부유하게 하는 폭력적 상황을 견인하는 계기 또한 마련하였다.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성급하게도 통치의 정보화의 반동적 효과로서 과격주의적 폭력 사태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발딛고 있는 공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는 비판이다. 우리의 가장 급박한 문제는 과거의 과오로 인해 더이상 혁명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예외상태'를 추인하는 것은 차라리 너무나 많은 정보와 이 정보권력과 결부된 구조적 폭력의 식별이 불가능하게 된 자본주의의 세계이지, 일련의 이념적 상황들이 야기한 과거의 오명으로 모든 문제를 소급하는 것은 정작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과 기획들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할 뿐이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판독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유혈사태가 봉기하도록 한 그 책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다. 역사의 상처는 그 상처를 낸 창을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을 말하지 않기  

 

이 책의 가장 낭만적인 구절은 끝없이 지속될 문학의 가능성을 언급할 때가 아닐까? 그게 단지 인류 문명의 역사가 앞으로도 380만년은 계속될 것이며 예술의 불씨 또한 380만년간 꺼지지 않을 거라는,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근거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우리는 저 예술에 관한 다원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미래지향적 태도가 지시하고 있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모든 우려들, 예술의 종언을 앞당기는 저 지긋지긋한 선언들이 감지하고 있는 것들, 점점 사회의 적대와 모순과 예술이 괴리되고 있다는 어떤 모종의 징후들이 그저 자신의 대에서 세계가 끝나는 것을 보고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측정한 범주의 문학이라면 물론 문학은 계속해서 설계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또한 끊임없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현재의 문학이 혁명적이기 위해서는 그 언어 안에 세계가 기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온갖 거짓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세계 없음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발돋움하기 위하여 현재의 언어에 혁명을 박아넣어야 할 것이다. 영원을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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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c

from 짧은말 2012. 11. 14. 22:10

 

 

 

 

- 한달 전쯤 뉴욕에 다녀왔다.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365일 연일 반짝이는 타임스퀘어, 인디씬의 메카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 등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이 으레 밟는 코스를 무슨 의무처럼 돌아다녔다.  전지구를 아우르는 금융 자본의 심장부이며 제 3세계에 민주주의를 수출한답시고 자유주의의 미덕을 읊어대는 이 국가의 동맥과도 같은 공간에서, 거대한 문화자본에 감탄도 하고 이 문화자본의 축적 때문에 과거 자행했던 약탈에 대한 욕지거리도 내뱉으며 수일간을 지냈다. 많은 인파가 쏟아지는 맨하튼 한복판에서는 흡사 종로 바닥이나, 강남역 인근을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검은 머리 인종들이 가득한 맨하튼이 궁금하다면 서울 한복판을 떠올리면 될 일이다.

 

- 언제나 드라마며 영화의 단골 배경이 되곤 하는 이 도시에 내가 섞여들어가 있는 그 낯선 풍경을, 한국에서의 한결같은 일상에서도 반쯤은 그려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호퍼의 회화가 환기하는 키치에 너무 젖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뉴욕은 그의 그림 그 자체였다.  콘크리트로 가득 메워진 도시를 지배하는 퇴색된 정서. 나를 향해 던져진 무의미한 손짓과 눈빛 속에 담긴 손쓸 수 없는 고독과 불안.  나는 항상 이런 것들에 매달려 있다. 막상, 그의 그림은 두어점 밖에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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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9. 11. 00:27

 

 

 

 

"아마도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이 고통이

살아가는 동안 그 '굳어진' 형태들이 새로운 '대상들'과 새로운 상황들

 새로이 만나는 존재들 속에 투사되어 있던 그 고통이

 어떻게 하나의 비극이나 그런 결단이라는 우발적 출구로 분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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