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sis und Kritik'에 해당되는 글 2건

  1.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것은 혁명의 문법이다 2013.01.15
  2. 브라운관의 사회학. 2012.04.17

 

 

 

 

"독서에는, 적어도 독서의 출발점에는 이미 감긴 눈을 생명에 눈뜨게 하려는 비상식적 움직임을 닮은 현기증 나는 그 무엇이 있다. 영감처럼 하나의 도약, 하나의 무한한 도약인 욕망에 관련된 움직임. "

 

 

 

 책에 대하여 논하는 인문서가 한국 출판 시장에서 스테디셀러로 흥행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시대의 교양으로 손꼽히는 덕목은 인문학적 지식인바, 명문대 교수가 혹은 자기계발의 대가가 나열하고 요약한 세계의 명저 리스트만 외우고 있어도 시장논리가 좌우하는 우민이라는 대열에서 이탈한 나 자신을 상상할 수 있다. 단 몇 권의 책으로도 수백권을 아우를수 있으니 이 얼마나 경제적인 독서인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기회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선호하는 지식인이며 비평가가 읽어야 할 책과 읽지 않아도 될 책을 분류해주니 우리는 독서로부터 너무나 안전한 상황에 놓여있다. 손쉬운 독서에 저항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개인의 인문학적 자기계발이 현대인의 미덕으로 부상하였으므로 우리는 누군가 그에 관해 그토록 고심한 것마냥 독서라는 행위에 대하여 굳이 성찰할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자체로 그것은 이롭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어떤 이가 "책을 읽어버리면 미치고 맙니다" 따위의 발칙하기 짝이 없는 말들을 태연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책이 올해의 책에 꼽히기까지 하는 영광을 얻는 것은 앞서 말한 양상에 비추어볼 때 짐짓 타당한 결과지만 그 내용물을 들춰보면 이 책이 갖는 도발적인 담론이 그냥 가볍게 무시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다, 타인의 꿈을 꾼다".  요설에 불과한 것 같아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타자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이며 여기에는 어쩌면 광기에 붙들릴지도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하는 독서란 정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미증유의 무의식과 대면하는, 타자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접근이다. 일본의 젊은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시종일관 재기넘치는 문체로 끊임없이 읽는다는 행위를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호한 경고를 인용하는 것으로 단숨에 책과의 결투장으로 독자를 밀어넣는다. 책을 읽는 한, 모험은 계속된다.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 문학

 

언젠가부터 문학의 안위를 예측하는 태도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규명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문학의 공간은 사상의 각축장이 되었다. 심드렁하게 문학이 끝났다고 천명하던가, 문학의 죽음은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에둘러 변명하는 식의 주장이 횡행했다. 이에 관해 사사키 아타루는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이견을 내놓는다. 그는 문학에 대한 종말론적 선고를 비웃으며 차라리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우회하여 문학을 구제하도록 한다. 문학의 기원을 쫓는 그의 숨가쁜 추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덧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전에 이르는데,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란 정의를 도출하게 된다. 성서를 읽은 루터, 그의 표현을 빌어 '문학'의 사람인 루터에게 영향을 받은 법학자들이 실정법을 성문화한 법의 혁명이라는 용례를 들어가며 비호하는 문학이란 법과 제도 그리고 규범에 관련한 총체적인 텍스트이며 여기에는 혁명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의 혁명에 대한 그의 단언은 물론 옳다. 푸코와 르장드르의 세례를 받은 종교와 법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문학이 내포하는 혁명의 가능성을 발명해내는 그의 논리는 다소 비약적이고 관념적일지라도 일견 타당하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창시, 중세 해석자 혁명은 문학이 어떻게 혁명을 프로그래밍하는가를, 혁명의 유전자 지도를 그려나가는 문학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의식을 규정하는 언어의 물질성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 그 원대한 기획의 혁명적 비전이 역사의 닫힌 공간을 열어젖혔다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사사키 아타루가 열정적인 태도로 문학의 혁명에 대하여 진술할 때, 결연히 그 자태를 드러내는 이가 있다. 이 그림자를 사사키 아타루가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통치성 이론으로 혁명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인지는 아 수 없으나 어쨋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쓰기는 단지 제도와 체제에 관한 주석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이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역사의 본질과 법칙을 규명해낸 가장 혁명적인 글쓰기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이 단 몇권의 책으로부터 근현대사의 모든 이념이 발아하였다. 이 책은 때로는 폭력의 외피를 둘러쓰고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언가를 잉태하기도, 이 불길이 잠시 타올랐다가 사그라들었음에도 여전히 세계와 역사의 충실한 해석자로 남았다. 르장드르가 예고한대로, 사회의 규범을 정의하는 텍스트의 혁명이었던 중세 해석자 혁명은 통치의 정보화라는 부정적 효과로서 작동하였으며 이는 무조건적인 정보의 개방 속에 주체를 부유하게 하는 폭력적 상황을 견인하는 계기 또한 마련하였다. 사사키 아타루는 여기서 성급하게도 통치의 정보화의 반동적 효과로서 과격주의적 폭력 사태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발딛고 있는 공간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분석이 빠져있는 비판이다. 우리의 가장 급박한 문제는 과거의 과오로 인해 더이상 혁명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예외상태'를 추인하는 것은 차라리 너무나 많은 정보와 이 정보권력과 결부된 구조적 폭력의 식별이 불가능하게 된 자본주의의 세계이지, 일련의 이념적 상황들이 야기한 과거의 오명으로 모든 문제를 소급하는 것은 정작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제기되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과 기획들을 억압하는 기제로서 작동할 뿐이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판독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유혈사태가 봉기하도록 한 그 책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다. 역사의 상처는 그 상처를 낸 창을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원을 말하지 않기  

 

이 책의 가장 낭만적인 구절은 끝없이 지속될 문학의 가능성을 언급할 때가 아닐까? 그게 단지 인류 문명의 역사가 앞으로도 380만년은 계속될 것이며 예술의 불씨 또한 380만년간 꺼지지 않을 거라는,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근거한 것이라 할 지라도. 하지만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우리는 저 예술에 관한 다원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미래지향적 태도가 지시하고 있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모든 우려들, 예술의 종언을 앞당기는 저 지긋지긋한 선언들이 감지하고 있는 것들, 점점 사회의 적대와 모순과 예술이 괴리되고 있다는 어떤 모종의 징후들이 그저 자신의 대에서 세계가 끝나는 것을 보고싶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측정한 범주의 문학이라면 물론 문학은 계속해서 설계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또한 끊임없이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현재의 문학이 혁명적이기 위해서는 그 언어 안에 세계가 기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온갖 거짓된 정보의 바다 속에서, 세계 없음의 세계에서 주체로서 발돋움하기 위하여 현재의 언어에 혁명을 박아넣어야 할 것이다. 영원을 말하는 것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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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운관의 사회학.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드라마에는 사회의 모든 것이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TV드라마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을 체현하는데 열중하는 것은 이제 식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일 뿐이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를 저버리는 것을 고민하였지만 후에는 이 윤리를 세속의 윤리로 대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히로인들의 비극적인 서사를 우리는 현재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가 자아낼 수 있는 서사적 스펙터클의 최대치를 우리에게 과감없이 보여준 <브레이킹 배드>의 히로인 월터 화이트는 이같은 서사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다.  전락한 소시민이 시대의 윤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재탄생하는 시나리오가 브라운관에서 계속해서 상연되고 있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다. 드라마 뿐 아니라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승자독식의 사회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주체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찍이 우리에게 많이 타전됐을 법한 뉴스의 주인공들이 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투쟁의 역사가 바로 브레이킹 배드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몸이 불편한 아들과 임신한 아내, 그리고 대출 완납일이 까마득한 집 한 채가 가진것의 전부인 월터 화이트는 고등학교 화학선생으로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이다. 짐짓 평화로운 날이 계속 되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는 어느날 난데없는 폐암판결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화학에 대한 지식 뿐. 월터는 우연히 마주친 졸업한 제자 제시와 함께 마약을 제조해 팔기 시작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생존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마약 딜러가 된다는 측면에서 AMC의 <브레이킹배드는> 쇼타임의 <위즈>와 동일한 궤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월터 화이트는 능동적으로 자기 윤리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위즈의 그녀보다 시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자세를 취한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통해 우리는 의료시장의 불합리한 영리구조 덕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영위하는 미국 시민들을 목도한 바 있다. 일개 손가락 봉합을 위해 6천만원이 요구되는 비정한 사회의 구성원인 당신이 암에 걸리게 된다면,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주어질 뿐이다.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해 죽느냐 혹은 법의 굴레를 벗어나더라도 치료비를 마련하느냐. 이같은 상황에 놓인 월터가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마법과도 같은 솜씨로 메타페타민을 제조할 무렵에는 분명, 치료비와 가족의 생활비 등을 감당할 때까지만 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 따위와는 무관하게도 예상치못한 폭력과 살인 그리고 위협 등이 그를 완전한 음지의 세계로 견인해간다. 병이 완치되고 돈세탁이 필요할 정도로의 많은 돈을 벌어도 그는 마약 제조를 그만두지 않는다. 나아가 마약 제조업자라는 직업의식마저 갖게 되면서 동종 업계의 종사자를 위협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체성의 구축은 당면한 위기로부터 그를 구출해낸다. 이윽고 생존을 위해 가장했던 마약 딜러'하이젠 베르크'의 규율이 그를 완전히 지배함으로 시대에 불응하던 예전의 월터 화이트를 넘어서게 된다. 시장논리라는 이해관계를 계산해내고,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대처와 여기서 기인하는 모든 리스크들을 자신이 떠안을 수 밖에 없는, 미셸 푸코가 이미 정의한 바 대로 자기 경영의 테크놀로지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브레이킹 배드>에서 시대의 윤리가 호명하는 주체, 즉 오늘날의 경제적 합리성이 축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드라마가 연출하는 카타르시스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닥쳐온 폭력에 또다른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획이라 진단하고 이를 유연하게 실천하는 주체가 언뜻 자신의 정의에 복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월터는 언제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의 옛 친구에 의존하여 치료비를 마련할 수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며 계속 마약을 제조할 것을 고집한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하여 추동된 자기계발적 실존은 선악을 초월하는 정의가 되었다. 자신의 어린 딸을 추행한 기득권이 무혐의로 풀려나자 그를 살해하고 죽음을 맞이한 리투아니아의 아버지가 영웅이 된 것처럼, 특정 계층을 비호하기 위한 것으로 몰락해버린 사회질서에 반하여 자신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행위는 정의의 제스처라는 미덕을 거머쥘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리투아니아의 아버지와 월터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들을 정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주체로 한 데 묶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할 것이다. 폭력을 무기삼은 저항을 통해 다시 한번 '사회'로 눈을 돌리게 한 아버지와 마약딜러로 자신을 변주해버림으로서 '이런 주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원천적인 질문을 내던질 것을 포기해버린 월터는 분명히 서로 다른 주체의 양상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전자 쪽은 자신의 윤리를 관철할 것을 주장하여 자기 통치를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짐짓 자신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 경제적 합리성이라 불리우는 시대의 통치성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겨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브레이킹 배드에서 진정으로 식별해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월터 화이트를 어떤 주체로 정의할 것이며 그를 고안해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을 소묘하려는 노력이 바로 브레이킹 배드라는 사회적인 드라마를 창안해낸 동기일 것이다.

 

지난 4시즌에서 월터는 일생 일대의 적 거스 프링을 단번에 제거해버리는 신의 한 수를 두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이지 영리하다면,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자기 윤리를 내던지고 시대의 윤리에 복속할 것을 노정한 자본주의라는 것을 곧 깨닫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기 경영의 테크놀로지가 좀 더 옳은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이같은 사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주체의 도약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순간에 당도했을 때, 그가 모든 파국적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아 그의 비정한 세계를 산산히 소멸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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