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의 사회학.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드라마에는 사회의 모든 것이 묘사되어 있다. 때문에 TV드라마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을 체현하는데 열중하는 것은 이제 식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일 뿐이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를 저버리는 것을 고민하였지만 후에는 이 윤리를 세속의 윤리로 대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히로인들의 비극적인 서사를 우리는 현재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드라마가 자아낼 수 있는 서사적 스펙터클의 최대치를 우리에게 과감없이 보여준 <브레이킹 배드>의 히로인 월터 화이트는 이같은 서사의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다.  전락한 소시민이 시대의 윤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재탄생하는 시나리오가 브라운관에서 계속해서 상연되고 있는 것은 일면 자연스럽다. 드라마 뿐 아니라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우리는 승자독식의 사회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주체란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찍이 우리에게 많이 타전됐을 법한 뉴스의 주인공들이 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투쟁의 역사가 바로 브레이킹 배드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몸이 불편한 아들과 임신한 아내, 그리고 대출 완납일이 까마득한 집 한 채가 가진것의 전부인 월터 화이트는 고등학교 화학선생으로 아르바이트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이다. 짐짓 평화로운 날이 계속 되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는 어느날 난데없는 폐암판결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화학에 대한 지식 뿐. 월터는 우연히 마주친 졸업한 제자 제시와 함께 마약을 제조해 팔기 시작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생존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마약 딜러가 된다는 측면에서 AMC의 <브레이킹배드는> 쇼타임의 <위즈>와 동일한 궤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월터 화이트는 능동적으로 자기 윤리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위즈의 그녀보다 시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자세를 취한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통해 우리는 의료시장의 불합리한 영리구조 덕에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영위하는 미국 시민들을 목도한 바 있다. 일개 손가락 봉합을 위해 6천만원이 요구되는 비정한 사회의 구성원인 당신이 암에 걸리게 된다면,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주어질 뿐이다.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해 죽느냐 혹은 법의 굴레를 벗어나더라도 치료비를 마련하느냐. 이같은 상황에 놓인 월터가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이용해 마법과도 같은 솜씨로 메타페타민을 제조할 무렵에는 분명, 치료비와 가족의 생활비 등을 감당할 때까지만 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 따위와는 무관하게도 예상치못한 폭력과 살인 그리고 위협 등이 그를 완전한 음지의 세계로 견인해간다. 병이 완치되고 돈세탁이 필요할 정도로의 많은 돈을 벌어도 그는 마약 제조를 그만두지 않는다. 나아가 마약 제조업자라는 직업의식마저 갖게 되면서 동종 업계의 종사자를 위협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체성의 구축은 당면한 위기로부터 그를 구출해낸다. 이윽고 생존을 위해 가장했던 마약 딜러'하이젠 베르크'의 규율이 그를 완전히 지배함으로 시대에 불응하던 예전의 월터 화이트를 넘어서게 된다. 시장논리라는 이해관계를 계산해내고,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대처와 여기서 기인하는 모든 리스크들을 자신이 떠안을 수 밖에 없는, 미셸 푸코가 이미 정의한 바 대로 자기 경영의 테크놀로지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브레이킹 배드>에서 시대의 윤리가 호명하는 주체, 즉 오늘날의 경제적 합리성이 축조하는 주체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단순히 드라마가 연출하는 카타르시스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닥쳐온 폭력에 또다른 폭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사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획이라 진단하고 이를 유연하게 실천하는 주체가 언뜻 자신의 정의에 복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월터는 언제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의 옛 친구에 의존하여 치료비를 마련할 수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며 계속 마약을 제조할 것을 고집한다. 위기를 넘어서기 위하여 추동된 자기계발적 실존은 선악을 초월하는 정의가 되었다. 자신의 어린 딸을 추행한 기득권이 무혐의로 풀려나자 그를 살해하고 죽음을 맞이한 리투아니아의 아버지가 영웅이 된 것처럼, 특정 계층을 비호하기 위한 것으로 몰락해버린 사회질서에 반하여 자신의 윤리를 실천하려는 행위는 정의의 제스처라는 미덕을 거머쥘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리투아니아의 아버지와 월터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들을 정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침윤된 주체로 한 데 묶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할 것이다. 폭력을 무기삼은 저항을 통해 다시 한번 '사회'로 눈을 돌리게 한 아버지와 마약딜러로 자신을 변주해버림으로서 '이런 주체의 변혁을 요구하는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원천적인 질문을 내던질 것을 포기해버린 월터는 분명히 서로 다른 주체의 양상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전자 쪽은 자신의 윤리를 관철할 것을 주장하여 자기 통치를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짐짓 자신의 정의에 부합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 경제적 합리성이라 불리우는 시대의 통치성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겨버린 주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브레이킹 배드에서 진정으로 식별해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월터 화이트를 어떤 주체로 정의할 것이며 그를 고안해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을 소묘하려는 노력이 바로 브레이킹 배드라는 사회적인 드라마를 창안해낸 동기일 것이다.

 

지난 4시즌에서 월터는 일생 일대의 적 거스 프링을 단번에 제거해버리는 신의 한 수를 두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이지 영리하다면,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바로 자기 윤리를 내던지고 시대의 윤리에 복속할 것을 노정한 자본주의라는 것을 곧 깨닫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기 경영의 테크놀로지가 좀 더 옳은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이같은 사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주체의 도약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순간에 당도했을 때, 그가 모든 파국적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아 그의 비정한 세계를 산산히 소멸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