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3

from 짧은말 2010. 2. 3. 01:01



심신이 지친 하루였다. 오후 무렵에는 예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너절한 인생살이같은 것에 대한 생각으로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만 보냈다. 철이 들면서, 학업에 여념하던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때의 내가 게을리 하지않았던 것은 극심한 결핍의 상흔만이 가득찬 현실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이상 사이의 틈을 계속해서 메꾸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괴리를 극복하지 못함은 나의 부덕함 탓이다. 단 한번도 욕망하지 않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던 이들을 태연스레 내치는 반동적 히스테리 증자의 얼굴을 벗겨내지 않은 것도 역시 나의 부덕함 탓일 것이다. 저런 삼류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의 징후적 인물이, 한껏 빛이 났다, 곧 명멸하는 빈사의 풍경이, 그것이 차라리 나의 운명이라면, 그것이 꽤나 필연적인 귀결임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태원, 광화문, 문래, 신도림을 돌아 다시 집으로 향하는데, 처리해야 할 일은 제 때 시간에 맞추지도 못해 끝낼 수 없던 데다가, 급작스런 한파에 목덜미에 와닿는 한기는 너무나 소름이 끼치고, 꽁꽁 싸매 얼굴의 반까지 뒤덮인 목도리에 닿은 입김만이 유난히 뜨거워서, 지하철 문이 열리고 또다시 닫히고, 잠시 정차하는 그 시간이 무게로 환산되어, 점점 어깨를 눌러오는 것만 같았다. 나를 몇시간이고 기다려준 이도, 딱히 무언가를 약속한 이도 없는데, 이렇게나 늦어진 것이 억울했다. 심장이 내려앉은 장소 밑부분에 빽빽이 들어찬 가시들을 이제서야 발견한 것 마냥 초조해지는데, 익숙치 않은 신발과 마찰하는 피부가 쓰라려 걸음은 느려지고, 지하철이 쌩하니 이동하는 굉음과,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옷자락이 부딪히는 소리, 전화 음성, 구두가 또각또각 하는 신경질적인 소리들이 귀를 에워싸는데. 메마른 가슴이 울컥한다. 너를 만나고 싶어 라는 생각과, 영원히 너를 만날 수 없을거라는 예감에서 생겨난 흠집이 그만 못내 시큰거려서. 그것이 고립 상태의 일순간에,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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