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는 시대를 타고난 인문서적이다.


신년을 눈앞에 두고 한 해를 결산하는 기사가 속출하는 와중에, 2010년 출판 시장의 동향을 분석하고 있는 글의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책을 꼽으라면 그 책은 누구나가 예상하듯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50만부를 웃도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기록적인 판매 성과와 언론에 수도없이 회자되어 기어코 대통령마저 여름 휴가에 읽는 책이라고 언급한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의 성공신화의 저변을 구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그리 요원한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온갖 석학들과 지식인들의 좌담에서 그들은 입을 모아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은 우리 사회가 이제 정의라는 가치를 호출하고 있다라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목적론적 결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담론을 좀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컨대 오늘날 정의란 개념은 무엇에 인준해야하는가 혹은 무엇에 정초해야하는가로.  <정의>란 가치가 함의하는 윤리적 외피만를 긍정하여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선에 기초하는 정의 관념이 시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주축으로, 우리는 사회에 질의해야한다. 북모닝CEO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쏟아지는 세간의 성찬과는 차별화를 두고 샌델의 정의론을 좀더 다차원적인 정치철학의 시각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과연 정의로운가

이미 북모닝CEO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차례 다룬 적이 있고 하니 똑같은 내용을 읊음으로써 지면낭비 하지 않기 위해 샌델의 정의론에 관하여는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21세기식 계승자인 샌델은 철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예시들을 사례로 들며 공리주의, 자유주의 등의 개념들을 비교서술하다 결국 공동선을 위한 정의관을 주창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음한다. 샌델이 추구하는 정의론은 도덕과 시민 의식에 입각한 공동선과 정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조차도 종교와 도덕적 이상과 미덕을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가 규정하는 도덕이 과연 보편적 진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해봐야 할 것이다. 일례로, 낙태와 동성애 결혼의 합법화 등의 안건에 대해서 여러 공동체들은 이념에 따라 각기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여하한 도덕 담론에 관하여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도덕담론이 공론화의 장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효과를 넘어서, 개인의 신념을 국가와 법이 좌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거라는 비관적 전망을 피해갈 수 없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원제-straw dog's)에서 그레이가 소개한 일화를 들어보자.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열여섯 살짜리 수감자가 간수에게 강간을 당했다. 아침 점호 때 모자를 쓰지 않고 있는 사람은 즉시 총살당한다는 규칙을 아는 그 간수는 강간당한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다. 그가 총살당해 죽고 나면 강간 사실을 덮어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수감자도 모자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고 있는 동료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고,살아 남아서 이 일을 밝힐 수 있었다. 동료 수감자는 총살당했다"

이 수감자에게 공동체적 정의를 물을 수 있을까?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의 세례를 받은 염세주의 철학가 존 그레이는 정의란 관습의 산물이며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극히 시대적 통념과 연계하는 가치일뿐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거칠지만, 도덕조차도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라 명명할 수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의 정의란 더더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공동선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윤리

 사실 우리는 철지난 공동체적 기획을 견지하면서 지금, 정의란 개념을 너도나도 부르짖고 있는 격이다. 마이클 왈저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저, 그리고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출범한 시기는 롤즈 식 자유주의가 횡행하며 윤리보다는 개인의 자유에의 옹호가 우선시되던 시기였고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미국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이론으로써는 분명히 유효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 공동체주의 이론이 적용 가능한, 실효성 있는 이론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보다 선행하는 사회이다. 공동체의 질서가 개인을 기각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여기서 더더욱 공동체의 윤리를 주장하는 샌델의 이론이 과연 적실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가 기각하고 있는 것을 재고해야함이 옳지 않을까?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 그것은 장정일의 서평에서 그가 운을 띄웠던 안티고네의 윤리, 주체의 윤리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테베의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녀의 형제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오이디푸스의 저주대로 서로 싸우다 모두 죽고 말았다. 테베의 새 지배자가 된 숙부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리네이케스는 역적으로 취급하여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의 시체를 내다버리고 장례도 치루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령을 내림에도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를 치루었고 이에 분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 안티고네는 감옥에서 끝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은 안티고네를 따라 목숨을 끊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왕비도 세상을 뜨고 크레온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여기서 안티고네는 크레온이라는 도시 공동체의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이다.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하는 자신의 윤리를 거리낌없이 실천하는 숭고한 주체. 샌델의 공동선에 입각한 정의론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윤리는 욕망에서 출현하는 윤리이므로 정의에 거스르고자하는 윤리일 것이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안티고네의 윤리야말로 국가와 공통 도덕으로 형상화된 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공동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는 우리의 윤리를 그것이 진리인지도 파악이 불가능한 공동체적 가치를 위하여 제거함이 정말 옳은 것일까. 하지만 안티고네의 행보- 윤리의 실천이, 크레온- 잘못된 법질서를 붕괴시켰다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자

샌델의 공동선을 위한 정의론이 다원화된 현대의 사회를 정의라는 가치를 무기로 통일된 하나의 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샌델이 간과하는 또다른 진실은 다양한 공동체들간의 공존할 수 없는 이념의 차이가 실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정의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포섭할 수 없는 차이이다. 이런 현실태를 직시해냄함과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정의론을 모색하여야한다. 우리는 어쩌면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보다 구체적인 정의론에서 답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화하는 우리의 세계와 격동하는 변화에 부합하는 정의의 원칙을 새롭게 정식화하고 있는 프레이저의 이론은 도덕적 딜레마를 공동체적 차원에서 해소하려는 샌델의 협소한 정의관에서 추출하기 어려운 정의론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례적인 성공을 단순히 사회에 만연하는 부도덕에 질식사하던 대중들의 일시적인 심폐소생술, 혹은 죽어가는 인문서적 시장의 기사회생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의 성공신화가 투사하고 있는 것은 점점 사회가 인문학적 가치에서 어떤 탈출구를 탐색하려는 시도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주지했듯이 서구이론의 수용에 있어 우리의 현실에 적실한지를 판정하는 제스처가 선행되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용은 옳지 않다고 서술했으나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정의'를 호출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성찰을 위한 긍정적인 청신호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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