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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2010.06.15
  5. .. 2010.06.02
  6. kaskade 2010.05.03
  7. <더러운 철학> 2 2010.04.27
  8. Sviatoslav Richter 2010.04.05
  9. 20100326 2010.03.26
  10. 맑스 출현 이전의 사회이론과 현대시민사회의 형성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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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8. 2. 01:27




어느 날 아침 음산한 거리에서
안개 때문에 더 높아 보이는 집들이
물이 불어난 강의 양 둑처럼 보이고,
더럽고누런 안개는 배우의 넋을 닮은

배경이 되어 사방에 넘쳐흐를 때

-<일곱명의 늙은이들>, [악의 꽃]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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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1

from 짧은말 2010. 7. 21. 15:36

- 혓바늘이 돋았다. 2주일간은 이런 상태가 지속되겠다. 덕분에 목까지 아플 성 싶고 아마도 이는 총체적인 면역력 저하때문일 것이다. 전국이 더러운 수증기로 푹푹 삶아지고 있는 냄비속의 걸레라도 된 마냥 후덥하다. 연신 흘리는 땀 때문에 온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듯 해서 물을 들이켜도 그것은 곧 대기속으로 증발할 뿐, 갈증은 여전하다. 여름날의 참변을 늘어놓는 것도 이젠 지겹다. 나의 신경증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 너의 도착을 스스로 폭로하는 비극들을 타전하는 강제적인 수신과 공허한 수신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울함이 이를 배가시키고 있다. 모든 세속적인 비참함, 세계가 미쳐 돌아가는 것의 이유를 인간을 제정신으로 살게 하지 못하는 고온의 열기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차라리 속편한 이유가 될 것이다.   

- 독서일기나 비평 시리즈같은걸 쓰는게 어떻겠냐는 조언을 들었다. 그렇게하면 어쩔수없이 계속해서 글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든 내 저주받은 게으름을 타파할 수 있다면 그 쓸모있음이 함량미달이라 할지라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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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카테고리 없음 2010. 7. 15. 01:28




-불뿜는 럼으로 통하는 바카디151의 너무나 차가웠던 맛. 코끝을 스치는 거리의 악취와 여름바람의 텁텁함. 너를 위해서, 혹은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을 부지한다고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누군가들을 부러워하고 또 시기하는 순간들의 섬뜩함. 진부한 말들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상기시키는 것들. 기억을 더듬어야 간신히, 간신히 그정도뿐이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같은 것들.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것들.



-아렌트는 시오니스트이기전에, 인간 정신의 힘에 관한 신념을 잃지 않은 휴머니스트다.  인간에 대한 강한 희망의 끊을 놓지 않은 점을 높이 사고 싶은 이유는 나로서는 절대적으로 불가해한 영역에, 정반대의 대척점에 그녀가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구구절절=구질구질이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날 죽이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결벽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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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6. 15. 15:19

단어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나와 함께 살고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 아파트는 책들, 잡지와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들, 그리고 내가 쓴 원고들이 마치 상승 기류에 붙들린 10월의 나뭇잎들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는 곳일 뿐이야.

나는 밤이 되면 불타오르는 듯 강렬한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녀. 그곳에서 겁에 질린 채 들떠서 무리지어 움직이는 다종의 군중을 보지. 하지만 내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해.

-Benjamin's Cro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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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6. 2. 15:11

 




특히 나에 관해 말하자면, 난 내 인생의 극한까지 갔기 때뭄ㄴ에 당신들은 나의 절반도 오지 못할 것이며,
당신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자신의 소심함을 분별력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난 아마도 당신들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더 집중해서 살펴보시라!
물론 우리들은 실제적인 것이 지금 어디에 있고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불리는지 알지 못하지 않은가?
책이 없이 우리들만 남겨두면 우리는 곧 혼돈스러워하고 길을 잃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 본연의 신체와 피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조차 번거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없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는 기회를 엿본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며 오래전에
이미 살아 있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점점 더 만족해한다. 우리는
그러한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우리는 곧 어떻게든 사상으로부터 태어나기를 꿈꾼다
하지만 이제 그만.
난 이제 더는 '지하로부터' 글을 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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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skade

from 짧은말 2010. 5. 3. 16:16










데드마우스의 리믹스로 더욱더 유명세를 탄 i remember의 도입부와 비슷한(거의 같다) 곡이 수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전작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은 듯한 kaskade의 신보.
섣불리 도전을 감행하기가 힘든 것이 기존의 라운지 음악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kaskade의 서정적인
멜로디컬함은 그러한 실험정신이 가미되지 않아도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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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철학>

from 짧은말 2010. 4. 27. 14:06




세상에 더럽지 아니한 것이 없나니 -<더러운 철학>, 김진석

단순히 책을 읽고 텍스트를 해석하고, 또 생산하는 일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할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며 동시에 직업적 철학자로서의 자기검열이 낳은 양심적 진술이라 할수 있다. 철학의 소용을 논하는 텍스트의 일례를 드는 것은 비근할테지만, 철학의 더러움을 이토록 치열하게 고발하려는 학자가-강단철학자들 내에서-몇이나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상정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자리에 김진석 그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아니, 어떠한 관념론적 해석도 허용치않는 그의 입장을 견지해본다면, 그는 필히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에 매겨지는 자리지움 자체를 거부할 터이다. 그렇다면 그를 어떤 주체로, 어떤 철학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엉뚱하고 삐딱하고 우스운 행동들을 통해 심오함을 찾는 주체, 기꺼이 더러움을 무릅쓰고, 더러움에 빠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철학자의 초상으로서 김진석을 소묘하는 것이 가장 적확한 묘사가 아닐까.

김진석이 철학이라는 부단한 분과 학문의 이름앞에 더러움이라는 형용사를 나란히 진열하고자 함은, 오늘날 철학이 온갖 부조리하고 구차하며 진부한 것으로 가득찬 세계의 외연과 내포에 대해 침묵하고, 보편적인 원칙과 이상의 순결함만을 추구하는 위선을 폭로하고자 한 비판의식에서 비롯한다. 철학이 더이상 제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변혁을 일궈내기 위한 단초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을 조장한 것은 철학교수들에게도 책임이 있으며, 이러한 위기에도 자성의 목소리는 함구한채 철학교수라는 세속적 지위를 누림으로 자신의 철학함을 인정받는 강단철학자들의 철학 근본주의적 태도에 관한 극렬한 추궁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지적이다. 철학이 현실에서 제대로 용해되지 못하고 개념적인 이론의 정립에만 천착하는 실태에 관한 신랄한 비판-그런데 철학의 효용에 대한 고민이 철학의 중요 과제가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또한 정당하다. 다만, 내부고발자의 스탠스에서 철학의 효용과 철학교수들의 무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혹은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더러움을 무릅쓰고 그것의 벌건 속살을 면전에 들이미는 모양이 다소 강박적으로까지 비춰지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러한 비판적 논조를 펼치는데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난점이라면 난점이다. "오늘날 철학적 태도가 필요한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철학이 필요하고 이로운 것일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탈주를 사고할 수 없게 하는 자본주의적 굴레 내에서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주지하도록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보다 실천적이지 않을까. 철학에 관한 강한 회의감의 표출은 그의 니체주의자로서의 면모마저 들추게 한다.

그런데, 뒤를 이어 "이제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념적 작업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라고 기술한 단락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겨냥하고 있던 진정한 대상이란 근본적인 성찰이란 의미에서의 철학하기의 쓰임새가 아니라 초월적 사상의 관철을 위한 이론놀음의 영역에 머무른 채로, 앎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메꾸지 못하는 철학교수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실제로 대학 내의 나이 지긋하신 철학교수들의 폐쇄적인 학문적 지평과 문화비평이나 정신분석, 사회과학 등의 다른 분과학문과 철학과의 연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현실태를 상기해보면 한국 철학의 위기를 초래한 혐의에서 철학교수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가치가 대학 내에서, 사회내에서 소멸하는 것을 운지하고 있음에도 세속과 거리가 먼 학문적 정전만을 고집하고 있는 구차하고 뻔뻔한 태도의 철학하기의 형상을 김진석은 더럽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자들이 강구할 수 있는 자구책 중 하나로 김진석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철학을 현재의 문화적 맥락에서 사고하고 논의하자는 방법론이다. 철학이 고취하던 전통적인 인문학적 기치에서 벗어나, 메타영역으로서의 문화가 구축해나가는 새로운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출현들을 설명해냄으로 구체성을 획득하고 학문적 유효를 승인해내자는 것이다. 문화 내에서 인문학이 재편되고 복속되는 것으로 결부시킬 것이 아니라, 문화의 모호함이 투사하는 세계의 얼굴을 철학이 직시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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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iatoslav Richter

from 짧은말 2010. 4. 5. 14:31





Bach Fantasia & Fugue in A Minor






가슴은 우선 즐겁기를 바라지-
그리고- 고통의 회피를-
아픔을 마비시키는 저 하찮은 진통제들을-
그리고선- 잠드는 것을-
심판관의 뜻이라면 죽음의 특권을-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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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6

from 짧은말 2010. 3. 26. 14:44



우파 아나키스트라는 부류에 자신을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큰 영광일거라는 우엘벡의 발언은 공공의 적을 자처하는 한 무정부주의자의 지나친 솔직함이 배태하는 카타르시스 외에도 어떤 아이러니한 울림이 거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울림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수평선상에 위치한 두 기표를 함께 나열시킴으로, 자신은 양자에게 모두 유연한 태도로서 불화를 조율할 수 있다는 교묘한 위선을 가장했던 누군가의 초상을 뇌리에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사실인즉, 모든 새로운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조직과 프레임, 제도를 거부함과 동시에 권력의 외부에서 평등을 부르짖는 무정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이 과연 합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바쿠닌과 프루동을 대처나 레이건, 부시 등과 한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불일치하는 두 이데올로기를 모두 떠안음으로 생겨난 분열과 모순 외에는 어떤 식으로도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우엘벡의 외곩수적인 기질에서 우엘벡식의 우파 아나키스트는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68년도 5월, 유럽을 휩쓴 성의 해방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립이라는 변혁의 물결이란,  동물적이고 폐쇄적인 성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한 젊은 층의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했으며, 이 명백히 자본주의스러운 운동은 점차 현대문명을 동물의 왕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이러한 퇴행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종교적 절대성을 호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68의 유산이라 일컬을만한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그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스러운 이념을 배아시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종 글쓰기가 고통인가 아니면 쾌락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느낌으로부터 생겨나는 뭔가 다른 것 말입니다. 어쨋든 극도로 신경질적인 흥분 아니면 곧 진력이 나는 기분의 고양이 그것입니다-
- 나의 글쓰기는 길 위에서 자전거를 달리게 하고, 심연을 스치기는 하되, 그렇다고 그 심연으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작업의 연속입니다. 정말 진저리 나는 직업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작업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우엘벡

-가장 정확한 사유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틈새, 빈터, 빛의 화살 속입니다!-
-문학인가, 삶인가? 문학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는 겁니다. 나에게 삶은, 내가 이 삶으로부터 언어를 끌어낼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심오하게, 그리고 육체적으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
-시니피앙의 창백한 모습, 말의 섬세한 짜임새 같은 것 - 레비



나의 경우, 글쓰기란 볼썽사납게 돋아나있는 감각의 촉수들을 마모시키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사정없이 절개된 문장 발밑으로 끝없이 쌓여있는 감각의 잔여물에 매몰되어 그저 잦아들고싶은 것 뿐인 충동이다.  글이나 언어로 극복되는 고뇌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성마른 단어들이 응결하는 그 짧은 순간에 찾아든, 형용불가능한 감정의 일회적인 해소에서 비롯한 미증유의 안식일뿐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고뇌는 다시금, 무한한 언어의 지평 위에 군림한다. 무의식중에 써갈겨간 텍스트를 읽는 것은 당시의 지난한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다. 심화와 일시적인 해소가 반복되는 순환의 회로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경우의 수란 또다시, 있을 리 만무한 미래의 편린이다. 언어의 확실함만이 영원을 담보한다. 이것 외에,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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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민사회의 형성

1. 맹아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은 1200년대 중세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중세도시의 형성 이후에 융기
당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의 소상인들-시민citta들의 지배계급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 그 기원이 있다.  
2. 이행기 
후기 르네상스의 이태리 거부 메디치 가는 부의 축적으로 지배 계층에 군림하게 되고 곧 피지배/지배라는 계급의 분화에 일조하게된다. 마키아밸리의 통치술으로 강고히한 권력.
3. 고전적자본주의
후에 지중해 상권이 몰락하고 대서양 상권의 부상으로 산업자본주의의 영국이 위세를 떨치게 된다. A.smith 국부론-  상업 아닌 공업이 국부를 축적한다 .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4. 제국주의
계급투쟁보다 사사갈등이 심화.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은 협심하여 타 국가의 자본과의 투쟁
5. 복지 자본주의
아젠다-의제-의 출현
6.신자유주의

시대의 전환은 모순을 내재한 사회적 갈등이 그 동력으로 작동했기 때문

사회계약이론

현대 사회의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하려는 사회이론적인 작업은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시작. 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의 모든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연상태/사회라는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홉스-'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간들 내의 갈등의 충돌을 해결할 방법론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사회를 성립하는 것을 채택한다. 여기서 사회 성립의 요체는 갈등을 컨트롤하는 권력의 담지자인 정부,국가의 존립여부에 있다. 여기에서 사회계약론은 사회 성립이 정치적인 수준에서 사고됨을 알 수 있다. 자연상태와 대비되는 사회는 시민사회로, 다시말해 시민사회를 근본적으로 정치사회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사회계약론에서의 자연 상태는 원시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노동을 하고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을 사적으로 점유가 가능하고, 또 소비하는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요컨대 사회계약론에서는 인간의 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를 자연 상태로 간주한다. 경제적인 것이 사회 성립의 조건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았다. 경제적인 활동-자연상태, 사회-정치사회 /전근대적인 시각의 사회의식. 사회의 구성을 정치적인 것에 발견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police에서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통적인 사회의식에 해당된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정치사회 폴리스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이고 폴리스 즉 사회는 정치적으로 결합된 결사로 이해. 정치사회,국가=시민사회. 폴리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당시의 사회현실과 상응한다. 경제적인 활동은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시민들이 아닌 노예들의 경제활동은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경제적인 생산활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행위로 천시되었다. 아고라나 의회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이 시민이 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시민의 사회는 정치사회로 이해되었다.

사회계약론으로는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을 파악하기에 무리가 있다. 현대 시민사회의 근원적 성격은 헤겔에 이르러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었다. 헤겔에 와서야 시민사회와 국가의 동일시는 파기되고, 시민사회는 경제적 활동의 영역 즉 경제사회로 설정된다. 사회 성립의 요건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것으로 전치된다.
헤겔의 시민사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노동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상호관계에서 형성된다. 시민사회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합, 욕망의 체계로 규정된다. 헤겔에 이르러 경제적 활동이 사회의 구성적 요건의 자격을 획등하게 되며, 시민사회는 경제사회로 파악된다. 시민사회를 본질적으로 경제사회로 파악하는 헤겔의 시민사회관은 맑스에게로 이어지고 맑스는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회 성립을 설명하려는 철학적 이론화, 즉 사회와 역사의 유물론적 설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맑스의 기본적인 시각은 역사 유물론의 출발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은..현실적인 개인들 그들의 행동 및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들이라고 설정하고 있는데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시민사회를 본질적으로 경제사회와 동일시하는 것은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며 그것은 비단 맑스의 역사유물론만의 예외적인 견해가 아니라 헤겔 이후 현대 사회이론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획득된 일반적인 통찰이자 이론적 성과이다. 따라서 맑스의 경제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확장하여 시민사회가 경제사회라는 것까지 문제시한다면 이는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람시의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도 경제사회로서의 현대시민사회의 본질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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