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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200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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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3. 22. 00:35



어떤 나락이 눈앞에 있다. 신들의 황혼이 물러간 자리, 그 붉은 그림자가 무겁게 늘어진 곳에서 그것을 목격한다. 그 나락을 불러들인 것은 지겹게도 나를 몰아부치던 유년기의 방종이다. 조금도 진화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듯, 어릴적의 히스테리컬한 방종을 여전히 고수하는 주의주의적 태도를 영위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고 믿었다. 그 종교적 맹신에 가까운 강박과 정념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것만이 구원과도 같은 생명줄이었으며 유일한 열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염원으로서의 세속적 윤리를 거부하고, 또 거부하는 심리란 무슨 거창한 대의를 위한 신념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제도에의 복속은 곧 결박임을, 체제 여하의 규율화된 삶의 미덕이란 얼마나 기계적인지를, 또 얼마나 상투적이고 구질구질한 것인지를, 머릿속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마냥 그것을 뼈저린 혐오와 회의의 감정으로서 체화해버린 까닭이다. 교리처럼 이 땅에 주어진 질서의 바깥에서, 반사회적인 비현실주의자라 이름지워질 결벽을 움켜쥔 채로, 그것에의 집착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곧 한줌의 공기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으로의 방류됨을 의미한다. 아. 그래서 여기 나락이 눈앞에 있다.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매우 실존적인 잡놈이다- 허연의 고백은 채 막을 수 없이 터져나온 각혈이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닥 마디마디 사이로 흘러나온 시인의 피는 더이상 붉지도 않다. 스러진 것은 시인의 언어, 영원한 것은 그저 물질적인 것의 고스란한 모양새뿐이다. 물질이 보장하는 불변함과 확실함에 매달리는 처사가 단지 사랑을 얻기 위해서 라는 것이 그 이유라면 그것은 차라리 도덕적이다. 차라리 윤리적이다.




"처녀의 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가는 세상과 흠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과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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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락하는 것들이 역사의 뒤안길 너머로, 그것이 갑자기 도래했던 과정만큼이나 재빨리 퇴장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문학의 종언이니, 지식인의 종언이니 하는, 근대를 지배했던 이념의 종식을 단언하는 테제들이 산적하고, 그 언설들의 실질적인 효용을 가늠코자 하는 2차 컨텍스트가 홍수를 이룬다. 그 컨텍스트는 소멸이 선언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존재의 위용을, 그 형용모순되는 존재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일 터이다.  내면으로 침하되어 그 감각적 결을 어루만지는데 열중하던 근대 문학은 자취를 감추었고, 더이상 사람들은 리얼리즘에 천착하는 문학을 소비하지 않으며, 그것은 곧 종말을 맞았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더이상 문학을 논하지 않겠다' 라고 피력한 평론가의 테제가 양산하는 담론이, 그것이 선고된지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의 장에 위치해 있는 것은 <근대 문학의 종언>이 함축하는 예술의 종언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문단과 평단의 생산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들 존재의 파기를 암시하는 묵시록적 예언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들은, 문학이 일종의 혁명적 가치를 적재하고 있으며, 오성과 감성을 중재하는 상상력의 가능성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어떤 불가피한 믿음을 여전히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선언이 유효하다고 판정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감히 말하기를, 작금의 문학은 통상적으로 역사적 형식에 포획되기를 거부하는, 탈구축된 문학이다. 근대성이 완벽히 소거된 문학, 온 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역설하려 드는 문학. 오늘날 한국에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김연수의 소설에서 자기위안을, 신경숙의 소설에서 계산된 신파를, 박민규의 짐짓 청신해뵈는 스토리텔링이 차마 은폐하지 못한 진부함과, 이 모든 풍속적인 문학들에 '성찬'이 즐비한 평론을 조공으로 바치며 공생하기를 자처하는 평단과 문단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사실인즉, 이것이 오늘날의 예술임을, 아니 이러한 '예술'을 부정하는 제스처란 과거에의 신념을 고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답적인 이상가라는 정체성을 간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고하건대, 나는 시대의 낙오자라는 딱지를 이마 한 가운데 부착하기를 주저않는 인간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전근대적인 이념에 유착해있는 인간들에게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마치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한 추도문처럼 읽힌다.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대안으로서의 문학이 그 기력을 소진하여, 그것이 지양하고자 했던 보편적 기치에 '전복되어야 할 패러다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마저 달린 채로, 단지 자본의 하부구조 역할을 수행할뿐인 문화에 자리를 내어주고는 쓸쓸히 퇴장당하는 정경. 그것을 위한 추도문. 

  

 -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떄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중략.. 다만 문학이 영원하다고 생각한 시대가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리고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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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2. 21. 00:01




메일을 썼다가, 지웠다. 블로그의 글도 언제나 썼다가, 지운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읽어보면 그 유치한 감성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픈 심정이 들것이란걸 알기 때문이다. 이것도 쓰여졌지만 곧 지워질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쓰여졌다가, 지워지고, 잊혀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영원을 찾고자 해서 입게되는 상처에는 딱지조차 얹히지 않는다. 엄벌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하등한 인간이 넘본 댓가다. 관성적으로 영원을 꿈꾸는 것에,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둥, 망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인식하라는 둥, 두려움에 맞서라는 등의 그 또한 인간이 설정한 팩트에 불과한 것인 주장을 들먹이는 이들은 외려 자신들에게 상상력이 부재하고 있음을 '영원히'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화된 영원을 말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으로 자리매김당하는 현실에 상처입는건지, 인간은 누군가와의 영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진실 앞에 상처입는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영원을 말하기 전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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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2. 11. 20:57






펜듈럼 신보 릴리즈 커밍순




알렉산더 맥퀸이 목을 매 죽었단다. 그의 오띠꾸뛰르는 이제 전설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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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from 짧은말 2010. 2. 8. 16:24

글쓰기에 의해 고뇌를, 불안감을 도려내고 자기 구원을 도모한다는 카프카의 일련의 작업은 얼마만큼이나 그 자신에게 유효한 효과를 산출해내었을까. 겹겹이 쌓인 점층적 배열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시시때때로 조제되는 환멸의 감정들. 마모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날이 서리는 것. 그야말로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인데, 가야할 길은 까마득하니 도달할 수 있을것 같지가 않다. 반복되는 유희와 절망만이 산적한 그 과정은 가히 사드마조히즘적인 형상을 띤다. 두렵지 않다고 해서 아프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 지혈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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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2. 7. 19:49


작가는 그의 고통, 자신이 소중히 여겨온 용龍들에 의해, 또는 어떤 경쾌함에 의해 텍스트에서 자신을 재치 있는 어릿광대로 설정해야 한다 -말라르메- 얼마나 역설적인 말인가! 가장 직접적이고도 가장 즉흥적인 글쓰기의 형태를 선택하면서 나는 가장 서투른 광대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광대가 되어야만 하는 역사적 순간들도 있지 않은가? 나는 시대에 뒤쳐진 한 글쓰기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문학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문학이 사라져 가는 바로 그 순간에 찢어질 듯한 아픔을 가지고 문학을 사랑한다고?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문학을 모방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대해 나는 어떤 열등감도 없다.

바르트의 고백은 은유와 상투적인 것의 죽음을, 더 이상 텍스트를 생산하거나 참조하지 않는 독자의 탄생을, 그리고 '즐김'과 '즐거움'의 텍스트에서 '욕망'의 텍스트로 전환하는 미래를 예상하고 있음을 짐작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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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from 짧은말 2010. 2. 3. 01:01



심신이 지친 하루였다. 오후 무렵에는 예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너절한 인생살이같은 것에 대한 생각으로 멍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만 보냈다. 철이 들면서, 학업에 여념하던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그때의 내가 게을리 하지않았던 것은 극심한 결핍의 상흔만이 가득찬 현실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이상 사이의 틈을 계속해서 메꾸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괴리를 극복하지 못함은 나의 부덕함 탓이다. 단 한번도 욕망하지 않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던 이들을 태연스레 내치는 반동적 히스테리 증자의 얼굴을 벗겨내지 않은 것도 역시 나의 부덕함 탓일 것이다. 저런 삼류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의 징후적 인물이, 한껏 빛이 났다, 곧 명멸하는 빈사의 풍경이, 그것이 차라리 나의 운명이라면, 그것이 꽤나 필연적인 귀결임을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태원, 광화문, 문래, 신도림을 돌아 다시 집으로 향하는데, 처리해야 할 일은 제 때 시간에 맞추지도 못해 끝낼 수 없던 데다가, 급작스런 한파에 목덜미에 와닿는 한기는 너무나 소름이 끼치고, 꽁꽁 싸매 얼굴의 반까지 뒤덮인 목도리에 닿은 입김만이 유난히 뜨거워서, 지하철 문이 열리고 또다시 닫히고, 잠시 정차하는 그 시간이 무게로 환산되어, 점점 어깨를 눌러오는 것만 같았다. 나를 몇시간이고 기다려준 이도, 딱히 무언가를 약속한 이도 없는데, 이렇게나 늦어진 것이 억울했다. 심장이 내려앉은 장소 밑부분에 빽빽이 들어찬 가시들을 이제서야 발견한 것 마냥 초조해지는데, 익숙치 않은 신발과 마찰하는 피부가 쓰라려 걸음은 느려지고, 지하철이 쌩하니 이동하는 굉음과,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의 옷자락이 부딪히는 소리, 전화 음성, 구두가 또각또각 하는 신경질적인 소리들이 귀를 에워싸는데. 메마른 가슴이 울컥한다. 너를 만나고 싶어 라는 생각과, 영원히 너를 만날 수 없을거라는 예감에서 생겨난 흠집이 그만 못내 시큰거려서. 그것이 고립 상태의 일순간에,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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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from 짧은말 2010. 1. 18. 05:00


" 나는 뒤 파티 드클람 중령을 고발한다. 그는 법적 오류를 야기시킨 악마적인 장본인이었다. 나는 펠리외 장군과 라바리 소령을 고발한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편파적 수사를 펼치는 죄를 저질렀다. 나는 1984년 제 1차 군사 법정을 고발한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전달된 비밀 자료에 근거하여 피고(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법을 위반하는 죄를 저질렀다. 지금 나의 고발 행위는 진실과 정의를 앞당겨 분출시키기 위한 하나의 혁명적 방법일 뿐이다 "    - <나는 고발한다>

" 인간을 위해서 발생할 수 있는 행위는 정신이다. 그리고 정치가도 정신이니 정신적인 사람은 행동해야 한다! "

- 에밀 졸라


아아, 우린 고발할 곳이 없구나. 그리고 정신도 없구나. 정치도 없구나.  


2.



폭팔하는 청춘의 뒤흔들림이 인상적인 신진 개러지밴드인 japandroids.
정제되지 않은 멜로디, 거침없는 퍼커션의 행진, 성긴 보컬의 음색과 날뛰는 기타 선율의
조합이 생성하는 시너지는 청자를 통제불능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요즘 듣는건 이 녀석들과 m83, 존메이어의 신보뿐이다. 
뱀파이어 위켄드의 신보가 나왔길래 들어봤더니 전작의 격찬일색과 관계없이
그들의 달달함은 역시 내겐 사양하고싶은 그것일뿐이라는걸 다시금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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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30

from 짧은말 2009. 11. 30. 01:59



 




언젠가 꿈에서 목격했던 광경. 우리가 잃어버린 태초의 에덴.
이제와 물속의 풍경을 다시금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은연중에 발휘된
상실한 실낙원을 향한 회귀 본능으로서의 메타포일까.
물에 관한 몽상은 가까이는 어머니 자궁 속을 유영하던 시기의 기억을 갱신하고,
멀리서는 우주적 차원에서 종족적 무의식에 각인된 태고의 원형이 외재화한 클리셰이다.


초마다 업데이트되는 뉴스는 온갖 새로운 것들의 범람을 다룬다.
바다를 건너온 휴대폰을 구매하려는 대중들의 열광, 광화문 바닥을 점령한 TV 드라마의 촬영현장에 관한 기사들, 연예인 누구씨의 알고 싶지도 않은 가쉽를 다룬 기사들 기타 등등.
이것이 우리들의 세계이며 놓치지 않아야 마땅한 news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는 세계를 일곱번 재부팅 한 후에야 비로소 완성하게 되는데 우리는 몇번째 리부팅된 시뮬라시옹의 세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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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09. 11. 24. 01:26
..반대로, 푸른 하늘이라는 영역 속에서 세계는 그 어디에서보다 가장 비확정적인 몽상에 스며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몽상이 진정으로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은 그때이다. 푸른 하늘은 꿈 아래 파여든다.[스스로 푸르게 깊어 간다]. 몽상은 평면적인 이미지를 벗어난다. 얼마 있지 않아, 역설적이게도, 공기적 꿈은 깊은 (수직)차원만을 그저 갖게 될 것이다. 회화적 몽상, 즉 그림으로 된 몽상이 펼쳐지는 다른 두 개의 차원은 몽상적 가치를 잃게 되리라. 세계는 그런 즈음 진정 박 없는 거울의 저 건너편에 있다. 그 세계는 차안이 없으면서도 상상적 피안을, 순수한 피안을 가지게 된다. 우선, 아무것도 없다. 이어, 깊은profond 어떤 무가 있다. 마침내, 푸른 깊이profondeur가 있다.

"푸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클로델적 송가는 대답하리라. "푸르름이란 눈으로 볼 수 있게된 어두움이다"라고.

..."낮과 밤 사이의 푸르름은, 항해사가 동방 하늘에서 모든 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는 저 미묘한 순간이 입증하는 것 같은 그런 균형을 가르킨다."

"다양한 푸른 빛은 근본적이며 일반적인 그 어떤 것, 신선하고 순수한 그 어떤 것, 언어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감싸고 또 적셔 주는 온갖 것에 부합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여신의 옷자락이다."

"깊은 하늘을 본다는 것은 온갖 인상들 중에서 어떤 감정에 가장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것은 가시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아니 보다 더 잘 표현하자면 감정과 보는 것의 결정적인 융합이며 완벽한 결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융합은 어떤 사람의 더운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한 세계에 필적한 열정을 가지게 될때 느끼는 열감에서 벗어난 바로 그런 융합이다. 그것은 대지적 가슴, "셀 수 없이 여러 모습을 지닌 가슴" 이 형태와 색의 무한 풍부함을 마주 대하고 경탄할 때 갖게 되는 풍요의 인상들이란 무게가 덜어져 나간 기화이다"

-공기와 꿈, 가스통 바슐라르

이따금씩 참을 수 없어지면, 그러니까 의지와 쳠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그것이 결국엔 이성을 넘어선 후의 참상을 수습하기 위해 그 허물어진 경계의 철조망을 보수하고자 할 때는 이 책을 읽는다. 공기의 운동, 하늘, 구름, 몽상, 빛과 어둠, 별자리와 성운을 말하는 이 아름다운 언어들의 태피스트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 안다. 진실이 세계를 해독할 수 있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만일 내가 진실을 안다면 변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쨋든 내게는 둘 다 마찬가지다."  

세계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폭풍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위의 나약한 나룻배마냥, 종말을 향한 역사의 진행에 우린 저항할 수 없다. 물론 항간의 음모론처럼 3년 후에 목격하게 될 지구멸망의 미래같은 종류의 드라마틱한 종말이 아닐지더라도, 우리의 무의식 언저리에 묵시록은 다양한 양식의 내러티브로써 이입되어있다. 아마도 이러한 메커니즘의 근원은 제임슨과 지젝이 말했듯이 지구의 종말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푸코가 살아있다면- 노인성 치매에 걸리기 쉬운 나이일테지만-현재의 세계에 관하여 어떤 식으로 사유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반시대적인 인간의 표상과도 같은 그의 성향 상, 그의 친구 폴 벤느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처럼 사무라이의 정신으로 저항과 투쟁을 말하거나, 혹은 니체식 회의주의자의 전범으로서 분열된 주체의 시각으로 진리없는 세계, 잠재적인 전쟁터로서 정당성을 잃은 세계의 미래 따위가 중요할게 뭐냐고 주창하지 않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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