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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11.01.19
  2. 이것은 왜 정의가 아니란 말인가 3 2010.12.26
  3. 101130 2010.11.30
  4. 글로벌개더링코리아 2010 2010.10.14
  5. burial과 벤야민과 호퍼 4 2010.09.09
  6. . 2010.09.07
  7. - 2010.08.27
  8. . 2010.08.17
  9. 100811 2010.08.11
  10. 알튀세르 심포지엄 1 201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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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 19. 13:53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으로 황금으로 치장한 궁궐같은 집의 주거권을 획득하는, 그런 꿈같은 시대를
너는 나락 어딘가쯤을 하염없이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아마도 언젠가 시가 역사의 알레고리었던 적이 있었고 눈 먼 유토피아를 꿈꿨던 적이
있긴 할 것이다. 오늘날의 언어처럼 경색된 채 자기 세계에 침윤하기를 고집하는 미래는
예상 바깥의 것으로, 너는 너의 적을 어떤 소명에 위치시키기 위한 제스춰만을 그렸을 것이다.
비극은 탕진되고 유희는 켜켜히 쌓여 권태로움만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행복을 투여하여 감각이 마비된 배부른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소음이 사방을 에워싸고
바다건너 어느나라 총리가 어린 여자애들을 돈으로 유린했다는 염문들이
망막에 새겨졌다가 이내 소리없이 은폐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장하는 것이 꽤나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적 전략이 되는 풍경을
인간, 너는 감히 생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진보와 퇴보를 진언하는 이념들이 마구 뒤엉켜있는 와중에도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태연하게 방금 섭취한 짐승찌꺼기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리고 너는 야만의 혓바늘이 촘촘히 들어찬 그 한자락을 차지하고 서 있다.

1927년의 그 어스름한 저녁에 파리 거리를 배회하던 어느 망명자의 우울함이 발산하는
고통의 심연을 흐릿한 눈으로 읽어내릴 때 네가 감지해내는 것
그 멜랑꼴리가 너를 견디게 해주는 일말의 위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한심한 작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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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는 시대를 타고난 인문서적이다.


신년을 눈앞에 두고 한 해를 결산하는 기사가 속출하는 와중에, 2010년 출판 시장의 동향을 분석하고 있는 글의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책을 꼽으라면 그 책은 누구나가 예상하듯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50만부를 웃도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기록적인 판매 성과와 언론에 수도없이 회자되어 기어코 대통령마저 여름 휴가에 읽는 책이라고 언급한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의 성공신화의 저변을 구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그리 요원한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온갖 석학들과 지식인들의 좌담에서 그들은 입을 모아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은 우리 사회가 이제 정의라는 가치를 호출하고 있다라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목적론적 결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담론을 좀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컨대 오늘날 정의란 개념은 무엇에 인준해야하는가 혹은 무엇에 정초해야하는가로.  <정의>란 가치가 함의하는 윤리적 외피만를 긍정하여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선에 기초하는 정의 관념이 시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주축으로, 우리는 사회에 질의해야한다. 북모닝CEO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쏟아지는 세간의 성찬과는 차별화를 두고 샌델의 정의론을 좀더 다차원적인 정치철학의 시각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과연 정의로운가

이미 북모닝CEO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차례 다룬 적이 있고 하니 똑같은 내용을 읊음으로써 지면낭비 하지 않기 위해 샌델의 정의론에 관하여는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21세기식 계승자인 샌델은 철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예시들을 사례로 들며 공리주의, 자유주의 등의 개념들을 비교서술하다 결국 공동선을 위한 정의관을 주창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음한다. 샌델이 추구하는 정의론은 도덕과 시민 의식에 입각한 공동선과 정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조차도 종교와 도덕적 이상과 미덕을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가 규정하는 도덕이 과연 보편적 진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해봐야 할 것이다. 일례로, 낙태와 동성애 결혼의 합법화 등의 안건에 대해서 여러 공동체들은 이념에 따라 각기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여하한 도덕 담론에 관하여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도덕담론이 공론화의 장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효과를 넘어서, 개인의 신념을 국가와 법이 좌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거라는 비관적 전망을 피해갈 수 없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원제-straw dog's)에서 그레이가 소개한 일화를 들어보자.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열여섯 살짜리 수감자가 간수에게 강간을 당했다. 아침 점호 때 모자를 쓰지 않고 있는 사람은 즉시 총살당한다는 규칙을 아는 그 간수는 강간당한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다. 그가 총살당해 죽고 나면 강간 사실을 덮어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수감자도 모자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고 있는 동료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고,살아 남아서 이 일을 밝힐 수 있었다. 동료 수감자는 총살당했다"

이 수감자에게 공동체적 정의를 물을 수 있을까?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의 세례를 받은 염세주의 철학가 존 그레이는 정의란 관습의 산물이며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극히 시대적 통념과 연계하는 가치일뿐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거칠지만, 도덕조차도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라 명명할 수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의 정의란 더더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공동선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윤리

 사실 우리는 철지난 공동체적 기획을 견지하면서 지금, 정의란 개념을 너도나도 부르짖고 있는 격이다. 마이클 왈저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저, 그리고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출범한 시기는 롤즈 식 자유주의가 횡행하며 윤리보다는 개인의 자유에의 옹호가 우선시되던 시기였고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미국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이론으로써는 분명히 유효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 공동체주의 이론이 적용 가능한, 실효성 있는 이론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보다 선행하는 사회이다. 공동체의 질서가 개인을 기각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여기서 더더욱 공동체의 윤리를 주장하는 샌델의 이론이 과연 적실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가 기각하고 있는 것을 재고해야함이 옳지 않을까?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 그것은 장정일의 서평에서 그가 운을 띄웠던 안티고네의 윤리, 주체의 윤리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테베의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녀의 형제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오이디푸스의 저주대로 서로 싸우다 모두 죽고 말았다. 테베의 새 지배자가 된 숙부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리네이케스는 역적으로 취급하여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의 시체를 내다버리고 장례도 치루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령을 내림에도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를 치루었고 이에 분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 안티고네는 감옥에서 끝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은 안티고네를 따라 목숨을 끊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왕비도 세상을 뜨고 크레온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여기서 안티고네는 크레온이라는 도시 공동체의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이다.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하는 자신의 윤리를 거리낌없이 실천하는 숭고한 주체. 샌델의 공동선에 입각한 정의론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윤리는 욕망에서 출현하는 윤리이므로 정의에 거스르고자하는 윤리일 것이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안티고네의 윤리야말로 국가와 공통 도덕으로 형상화된 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공동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는 우리의 윤리를 그것이 진리인지도 파악이 불가능한 공동체적 가치를 위하여 제거함이 정말 옳은 것일까. 하지만 안티고네의 행보- 윤리의 실천이, 크레온- 잘못된 법질서를 붕괴시켰다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자

샌델의 공동선을 위한 정의론이 다원화된 현대의 사회를 정의라는 가치를 무기로 통일된 하나의 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샌델이 간과하는 또다른 진실은 다양한 공동체들간의 공존할 수 없는 이념의 차이가 실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정의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포섭할 수 없는 차이이다. 이런 현실태를 직시해냄함과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정의론을 모색하여야한다. 우리는 어쩌면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보다 구체적인 정의론에서 답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화하는 우리의 세계와 격동하는 변화에 부합하는 정의의 원칙을 새롭게 정식화하고 있는 프레이저의 이론은 도덕적 딜레마를 공동체적 차원에서 해소하려는 샌델의 협소한 정의관에서 추출하기 어려운 정의론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례적인 성공을 단순히 사회에 만연하는 부도덕에 질식사하던 대중들의 일시적인 심폐소생술, 혹은 죽어가는 인문서적 시장의 기사회생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의 성공신화가 투사하고 있는 것은 점점 사회가 인문학적 가치에서 어떤 탈출구를 탐색하려는 시도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주지했듯이 서구이론의 수용에 있어 우리의 현실에 적실한지를 판정하는 제스처가 선행되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용은 옳지 않다고 서술했으나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정의'를 호출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성찰을 위한 긍정적인 청신호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북모닝CEO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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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30

from 짧은말 2010. 11. 30. 18:30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살고 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전락하는 것들에 대한 매혹과 동요를 떨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막을 내리고 모든 세속화한 희극만이 상연되는 현실에 치를 떨면서도
이 전락의 미학에 온 감각이 매몰됨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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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개더링코리아 2010

from 짧은말 2010. 10. 14. 23:12




저스티스, 펫보이슬림, 아민 반 뷰렌 영접 ㅋ
저스티스는 기대보다 쏘쏘 였고 펫보이옹은 연륜덕인지 생각보다 흥했습니다.
작년보다 추웠던 덕에 아민은 30분 정도 보다 나와버린게 아쉬웠음.
작년 라인업도 좋은 편이었는데 올해는 하루만 진행되는데다가
라인업이 저렇다보니 관람객이 두배는 몰려온 듯.
덕분에 500원짜리 생수를 2000원에도 사 마시고 맥주는 사 마실 엄두도 안나고
여기저기 쓰레기는 넘쳐나는데다가 완전 상거지페스티벌이긴 했습니다.
펫보이의 흥한 디제이덕에 진행이 개차반이었던건 상쇄가 좀 되긴하지만 내년에도 이따위면 참 답없네..
 
저스티스가 생각보다 별로였던 것이 이게 디제이셋이었기때문이겠지..ㅜㅜ
라이브 동영상보면 진짜 흥한데 말입니다..
여하간 없는 돈에 가족카드-_- 하나 있는거 긁어서 간 것. 뽕은 뽑고 왔었어야됐는데.
이제 늙었다고 새벽 강바람 맞는 것도 힘들고 허리도 아프고
구두신은 발도 아파서 아민 끝까지 못보고  고 홈 할 수 밖에 없던게 아쉽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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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rial과 벤야민과 호퍼

from 짧은말 2010. 9. 9. 23:44









....모든 사물이 부단히 뒤섞이고 오염되는 과정에서 본질적 특징을 잃고 애매한 것이 고유한 것을 대체하듯이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대도시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비할 데 없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으로 안에서 사물을 창조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성 안의 평화 속에 가두어버리며, 또한 지평선의 출현과 함께 점점 더 각성되어가는 근원적 힘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대도시가 사방에서 침입해 들어오고 있는 전원에 의해 벽이 뚫리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외톨이처럼 거리들을 돌아다녔다. 이때의 거리 모습을 나는 이후 두번 다시 보지 못했다. 모든 집의 문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고 보도의 귓돌은 모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노면 전차는 하나같이 소방차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 벤야민











burial과 벤야민과 호퍼를 관류하는 공통 심상에 대하여. 인류는 진보하고 있으며 역사 또한 발전하고 있다는 인간의 가련한 환상의 본질이란 운명지워진 근원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 몸짓들이 여기에 있다. 
 


모두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한 노력들은 참으로 쓰잘데없는 짓이다.  그런데 왜 기대하지 않았어 라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운걸까. 왜 마음이 아플 때마다 슬며시 당신의 신음이 문장 하나 하나에서 새어나오는 그 고통의 단락들을 숨죽여 읽곤 하는 걸까. 그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내가 남의 상처따위는 아랑곳않는 파렴치한이기때문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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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9. 7. 03:56




-이틀 동안 붉은 굴같은 방에 쳐박혀 있다가 카페인 충전을 위해 새벽 두시쯤 밖으로 나왔다. 또다른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이 제법 분다. 새벽 2시의 이태원의 풍경이란 으레 그렇듯이 골목 어딘가에서는 제 육신을 술병과 함께 휴지조각 내팽겨치듯 아무렇게나 뒹굴리는 인간 군상과 귀찮은듯 그들을 깨우는 경찰들, 또 어딘가에는 저기 바다 너머 타국에서 온 이방인들이 모여서 알 수 없는 언어를 굴리면서 몇 가치의 담배를 나눠 피우는 모습들로 그득하다. 이태원의 새벽은 말초적인 욕망을 채우고 나면 찾아드는 필연적인 허무의 모양새다. 이 곳은 비주류들의, 이방인들의 모라토리움이다. 한가닥 한가닥, 신경을 타고 흐르는 욕구에는 급급해하면서, 전체적인 청사진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마다하는. 유예를 자처하는 인간들의 도시. 이곳의 밤을 걷을 때 나는 위태위태하게 경계를 거스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스카 와일드나 버나드 쇼가 공상적 사회개혁가에게 비난을 퍼붓고 가난뱅이들은 모조리 다 쏴죽여야된다는 식의 잔혹한 냉소주의로 세상을 조롱하며 아일랜드인 특유의 비정한 불경스러움으로 세속을 난도질하는 역설에서, 그 외관상의 표피는 분명히 감상주의를 배제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지나친 호전성은 외려 감상주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으로서 영국에 거주하며 이런 과격한 농담을 입에 담았을 때, 그들은 오만한 지배계급의 눈으로 촌스러운 야만성을 멸시하는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피지배 계급으로 가난함을 떨치기 힘든 민족의 현실을 함께 마주해야하는 입장에 처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가성이 그들의 가장된 냉혹함을 부추겼을 것이다. 내가 인간을 답없는 짐승이라고 조롱하며 비웃을 때, 나의 증상은 와일드와 쇼의 강박에서 몇걸음이나 떨어진 지점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짐작하기를, 이런식의 발화로밖에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심정에서, 무슨 분풀이라도 하는 것마냥 내뱉어진 말들은 그 속의 칼날만 첨예화된 채로 부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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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8. 27. 17:35






- 김현은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무질서한 나열들을 혐오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자주 쓰지 못하는 것도 나름의 명백한 변명거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끝없는 나르시시즘의 나선과 그 굴레 곁을 어정거리는 것이 드러내는 현상적인 곤궁함. 이것이 혀 밑에서 잠시 피어났다가 모든 현전하는 것들의 가시성의 압제에서 실체를 잃어버릴 때, 나는 도무지 무엇을 적어야할 지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덜어놓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 끊임없이 번식함에 괴로우면서도. 이렇게 몇자 적어내려 갈 수 있는 상태란 그것들의 재생산이 한계치에 임박해서 '말'로서 전화하는 비극을 저지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에서 비롯한 것임에 다름아니다. 혼종된 설명될 수 없는 온갖 것들의 부산물에 불과한 언어들에 물질성을 부과하는 작업은 감내 불가능한 것들이 결국은 돌출되었다를 의미한다. 네게 말로서 전달되어질 수 없는 것. 그것이 발화되었을 때 파국도 내정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글로서 그것들을 제거해버리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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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8. 17. 17:14



문학 이론은 실패를 사랑한다. 문학 이론은 완전하고 자기동일적이고 말끔하게 완비된 것이면 무엇이든 역겨워하며 부족함, 시대착오, 막장, 자기파괴에 매혹된다. 문학 이론의 주의를 끄는 것은 실패나 자기 모순을 다룬 문학작품들이다. 어떤 작품의 올이 풀릴 때, 또는 심장부에 있는 웅변적인 침묵을 내보일 때, 문학 이론가는 마치 무자비한 심리치료사처럼, 그럴듯하고 일관되게 보이려고 안쓰럽게 발버둥치는 그런 텍스트들이 사실은 영적으로 얼마나 엉망인지 밝히려고 달려든다. 문학 이론은 패매자의 미학으로, 서사시의 구조나 소설가의 의도에 대혼란을 가져오는 보잘것없는 세부사항을 옹호한다.

헤겔의 말을 빌리면, 이런 부정적인 것을 향한 몰두는, 굳건한 활기나 무조건적인 헌신이 더는 그 누구에게도 감명을 주지 못하는 요즘 시대, 즉 진실에 관한 확신은 과거의 것일 뿐이고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이러니나 모호성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정치적으로 회의적인 지금 시대에 잘 들어맞는 것 같다.


-테리 이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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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11

from 짧은말 2010. 8. 11. 02:10




- 난데 없는 수난의 연속. 하지만 내 인생에 이것의 불연속이란 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를 생각해본다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교훈이랄것까진 없지만 한가지를 얻으면 한가지를 잃는다거나 예상치 못한 불운이 닥쳐오는 것은 당연한 인과의 법칙이라고 여기게 되었다는 식의, 이상한 삶의 문법을 터득하였다. 하지만 내가 과연 너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 세계가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지, 인간 사고의 동인과 동선은 매우 자명하여서 그 패턴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던지 내게는 그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의 범주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네가 언젠가 했던 말들이, 네가 뭘 알아 라고 쏘아붙이던 너의 힐난의 말들이, 그것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말들이어서 그게 기뻤었다고, 이제 와서 그런 과거를 고백하는 건 좀 웃기는 짓이다.

- 그가 밝은 것만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때, 내가 이 괴리를 초월할 수 없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라 괴롭다. 태생부터가 음울한 인간은 별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 진정으로 무감각해 질 수 있는 믿지 못할 행운이 주어진다면 주저않고 그것에 투신할 것임을 안다. 이런 점에서 내가 감정노동에 시간과 기력을 할애하고 싶지 않은 여느 20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비루한지. 뭐가 그리 두렵고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무슨 설욕이라도 하는 것 마냥 너는 내게 별것 아니라고 혼자 울분에 차서 그리 재차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하는지. 그게 지겹지도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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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심포지엄

from 짧은말 2010. 8. 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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