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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2. 29. 17:47

 




-모두가 허기진 세계. 적막한 귀가길, 골목을 밝히는 허름한 네온사인에도 매달리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검고 푸른 물 밑에 잠긴 너를 떠올리는, 잠들기 전의 짧은 몇 분 가량의 시간은 해방의 찰나이다. 참회의 순간이 비켜나면 나는 다시 또 좁다란 방구석의 어느 모퉁이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야만의 시대라고 입을 모아 누군가들이 지껄이듯, 더이상 당신들은 시를 쓰면 안되었다. 알량한 계몽주의자를 가장해서라도, 치기어린 자코뱅주의라 손가락질 받더라도, 혹은 상투적인 문학의 탈을 쓰고서라도, 이 모두가 허기져 견딜 수 없는 사태에 대하여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서정을 말하기 마련이다. 싸구려 멜랑꼴리의 수사로 자신을 질식사시킨 시체들이 널려있다. 가끔 나는 무엇을 부여잡아야 할지 몰라 절망에 휩싸인다.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릴 길이 없다.

- 그래서 이 서정을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호소하는 시를 읽고 있자면 어쩌면 이것은 키치의 시학을 우스꽝스럽게 비유한 것이 아닐까하는 못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키치가 '일상 생활의 물질적 환경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시인은 쾌적한 일상을 유지하도록 하는 내적 질서에서 배어나온 포스트모던한 멜랑꼴리적 서정을 나름 디자인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쩔수 없이 떠올리는 것이다.

-자신의 허기짐을 감각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야말로 그것을 우회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세계와 실재는 어떤 형식을 통해서 가시화되어야 하냐는 물음이 남는다. 키틀러를 인용하여, 더이상 글이 소리와 이미지의 심상을 그려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리고 상품화한 미디어를 위한 교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뿐이라면, 실종된 문학의 행방을 일상화된 키치를 경유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면 여전히 우리의 서정시가 존재하는 이유를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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