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말'에 해당되는 글 67건

  1. 2018.05.31
  2. 2016.8.12 2016.08.12
  3. 부산. 2 2013.10.20
  4. . 1 2013.09.24
  5. . 2013.09.13
  6. . 2 2013.02.15
  7. nyc 2012.11.14
  8. . 2012.09.11
  9. . 2 2012.07.14
  10. . 2012.07.04

from 짧은말 2018. 5. 31. 18:39

 

우리 시대 분노의 행방과 영화적 미스테리.

<버닝>과 <쓰리 빌보드>를 중심으로-

 

 

1. "분노하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사라진 분노의 행방

2.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계

3. 미스테리가 된 영화, 영화가 된 미스테리 

 

 

셈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의 분노가 항구적으로 수신되는 상태에 놓인 세계를 생각해보자. 너나 할 것 없이 분노를 터트리는, 가히 범람하는 분노의 시대라고 우리의 역사를 정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전되는 분노는 당연하게도 폭력으로 진화된 양상의 분노다. 테러리즘 혹은 묻지마 살인 등 손쉽게 악으로 분류되는 객관적 폭력으로 발전한 분노가, 그리고 "시스템에 분노하라"는 구호 내에서의 이상적인,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요청된 "분노하라, 그러나 비폭력적으로."라는 구호의 유효성이 그 정치적 온건함만큼이나 온건하고 재빠르게 퇴장했음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발설되지 않은, 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소리없는 아우성같은 분노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채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이 분노를 품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들이 앓았던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분노하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분노에 침식당했는지를, 혹은 자신이 어떤 연유에서 분노라는 감정의 격랑에 휩쓸렸는지를 자각할 수 있는 인식론적 맵을 그리지 못한다. 온갖 식자들은 이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주력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이 분노에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곤경이고 미스테리다. 이 분노를 품고 있는 주체들에게는 해결되지 못한 분노를 그냥 흘려보내는 선택과 폭력으로 소진시키는 적극적인 선택이라는 두가지 방안만이 주어졌다. <버닝>의 종수는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자신 안의 분노를 불태운 적극적인 주체이고 <쓰리빌보드>의 밀드레드는 이 사라진 분노의 행방을 쫓기를 포기하는 주체다. 

,

2016.8.12

from 짧은말 2016. 8. 12. 16:55


Bon iver - The Wolves(The place beyond the pines ost)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will mark you

Harness your blame

Harness your blame, walk through


With the wild wolves around you

In the morning, I'll call you

Send it farther on


Solace my game

Solace my game, it stars you

Swing wide your crane

Swing wide your crane
and run me through


And the story's all over

In the morning, I'll call you

Can't you find a clue

When your eyes are all
painted Sinatra blue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Don't bother me)

What might have been lost

What might have been lost


Ah, ah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my pain

Someday my pain

Someday my pain



,

부산.

from 짧은말 2013. 10. 20. 23:51















































,

.

from 짧은말 2013. 9. 24. 02:53



-살아있다는 그 느낌 하나만을 위해서 이런저런 무모한 짓들을 감행하는 그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면 이런 상태는 얼마나 감각을 잃어야만 가능한 것일까? 그 어떤 노력 없이도 나의 삶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창밖으로 다급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올 때, 도처에서 누군가가 이 전쟁같은 삶과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 때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결별하는 중인가? 


-나는 그가 몰락하는 현대의 파우스트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월터 화이트는 파우스트의 곤경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곧 자기 자신이 메피스토펠레스가 된 인간이 아닐까? 구원의 동앗줄이란 가능성은 가족이 그를 떠남으로써 완전히 소멸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극단에 서는 것 뿐이다. 이 모든 비극을 위해 육년이란 시간을 분투한 딱 그만큼 장렬하게 당신의 인생을 마감하기를. 그 어떤 어설픈 소설들이 구현하지 못하는 보편성을 드라마라는 매체를 통해 승화시킨 빈스 길리건에게 경배를. 시나리오, 호흡, 연출, 주연들의 신들린 연기. 이만큼 철저히 계산된 완벽한 드라마가 다시 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

.

from 짧은말 2013. 9. 13. 01:42



-난데없는 가을 장마. 눅눅하다. 



-모든 사회화와 인정투쟁은 악셀 호네트의 주장대로 너무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맴돈다. 정확히는 악셀 호네트가 그러하듯 인정투쟁에서 헤겔적 저항의 힘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에 실패했을때 출현하는 부정성의 폭력적 형태에 대한 생각이다. 사실은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경제나 욕망, 성이 아니라 인정투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절망. 한국사회는 이같은 울분으로 가득차있다. 나 자신 또한 그렇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테제는 인간에게 가혹한 측면이 있다. "자신의 시대를 앞설 수는 없다". 이런 헤겔적 원환에 반대하며 마르크스보다 헤겔로 돌아가자라는 지젝의 주장은 물론 타당하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도래할 새로운 미래의 급진적인 공간을 열어젖히는 것. 파국의 디스토피아를 더이상 참조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디스토피아다. 수년전에 역사가 종결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루하루 단지 살기위하여 치열하게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을 강권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이 먹물들의 언어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이 신세계적 질서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견디고 견뎌라.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좆같은 자유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것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예전에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는 영원한 인류의 과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회가 낳은 병리적 정신질환과 싸우는 것 뿐이다. 엎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세계에서. 





,

.

from 짧은말 2013. 2. 15. 19:50

 

 

 

 

 

1. 더 이상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따라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말들이 이내 범람하고 만다. 오늘날 비평가랍시고 펜대를 놀리거나, 책과 인문학이 소비되는 풍토에 관한 인상적이고  개인적인 몇 구절을 읊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려는 이들의 비윤리적인 태도를 비판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비평은 사장되었다. 인문학은 신자유주의체제에 걸맞춰 상품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가끔 이런 태세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는다. 인문학의 컨텐츠화에 대한 탈경제적인 저항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토로한다. 모든 것이 경제 지수로 환원되어 사고되는 시대의 헤게모니로부터 인문학을 떼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언어를 논하고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는 작업은 과연 인류 역사의 이행을 추동하였던 보이지 않는 실재인 경제와 본질적으로 유리되어 있는 인간 고유의 무엇인가? 인문학을 세우는 일, 이론은 어떤 형식으로든 역사와 관계맺어 왔다. 이 관계맺음의 방식이 바로 경제다. 주어진 사회경제적 입장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옳은가? 자본주의가 인문학을 몰아냈으며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다고 탄식을 내뱉을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물신화된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먼저다. 저항은 차라리 가장 경제적인 것의 한복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 죽음충동에 대하여 사실 따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버티고 또 버티는 수 밖에. 단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원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서만 내가 딛고 있는 땅의 견고함을 느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확실히 말하건대, 너는 재앙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떠나 고립된 외계의 도시에 나혼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스마트 기기와 sns는 타자와의 모든 거리를 사실상 소거해버림으로써 인간을 고독의 굴레 속에 가둬놓았다. 언제든 발신은 가능하지만 수신의 항구적인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절망적인가.  

 

 

 

 

,

nyc

from 짧은말 2012. 11. 14. 22:10

 

 

 

 

- 한달 전쯤 뉴욕에 다녀왔다.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365일 연일 반짝이는 타임스퀘어, 인디씬의 메카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 등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이 으레 밟는 코스를 무슨 의무처럼 돌아다녔다.  전지구를 아우르는 금융 자본의 심장부이며 제 3세계에 민주주의를 수출한답시고 자유주의의 미덕을 읊어대는 이 국가의 동맥과도 같은 공간에서, 거대한 문화자본에 감탄도 하고 이 문화자본의 축적 때문에 과거 자행했던 약탈에 대한 욕지거리도 내뱉으며 수일간을 지냈다. 많은 인파가 쏟아지는 맨하튼 한복판에서는 흡사 종로 바닥이나, 강남역 인근을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검은 머리 인종들이 가득한 맨하튼이 궁금하다면 서울 한복판을 떠올리면 될 일이다.

 

- 언제나 드라마며 영화의 단골 배경이 되곤 하는 이 도시에 내가 섞여들어가 있는 그 낯선 풍경을, 한국에서의 한결같은 일상에서도 반쯤은 그려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호퍼의 회화가 환기하는 키치에 너무 젖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뉴욕은 그의 그림 그 자체였다.  콘크리트로 가득 메워진 도시를 지배하는 퇴색된 정서. 나를 향해 던져진 무의미한 손짓과 눈빛 속에 담긴 손쓸 수 없는 고독과 불안.  나는 항상 이런 것들에 매달려 있다. 막상, 그의 그림은 두어점 밖에 볼 수 없었다.

 

 

 

,

.

from 짧은말 2012. 9. 11. 00:27

 

 

 

 

"아마도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이 고통이

살아가는 동안 그 '굳어진' 형태들이 새로운 '대상들'과 새로운 상황들

 새로이 만나는 존재들 속에 투사되어 있던 그 고통이

 어떻게 하나의 비극이나 그런 결단이라는 우발적 출구로 분출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

from 짧은말 2012. 7. 14. 01:10

 

 

 

 

 "모든 집단이 사라지고 모든 종족이 흩어진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서로 격리되어 있지만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합치고자 하는 욕망을 상실했다."

 

 

 

,

.

from 짧은말 2012. 7. 4. 02:24

 

 

 

 

"불안의 능력과 행복의 능력은 동일한 것이다.

자기 포기에까지 상승할 정도로 무제한하게 '경험'에 자신을 열어놓는 것,

그런 경험 안에서 쓰러진 자는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의 측량할 길 없는 슬픔에서 측정되지 않을 행복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너무 깊은 앓이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 조심스럽게 순응하는 사람은 자신을 광란의 협조자로 만들지만

기인들은 버티면서 부조리를 멈추려 한다.

단지 그만이 불행에 맞서 '절망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가 아직 살아 있다'가 아니라 '삶이 아직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알량한 삶을 견디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