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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6. 20. 12:39

 





 -기나긴 고난의 경로를 통과한 후에야 구원은 온다.
이런 연유에서, 디스토피아는 희망의 역설적인 비전으로서 끊임없이 제시되는 것이다.





-우스개소리로, 박노자가 급진급진 열매를 먹었다고 하는데 그건 새삼 맞는 말일듯싶다. 2년전만해도 그는 차악으로서의 사민주의를 옳다고 여겼다.  혁명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서서 이 폭력을 피부로 체감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태도를 경계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마도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에 이주하게 되면서 선진 노르웨이 내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모순들을 적시하기 시작했던 모양. 여튼 그가 최근에 올린 포스트를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35697 보니 며칠전 누군가가 내게 건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럼 서로의 연인조차 공유하게 되는 거냐고 묻길래 그건 사적 자유의 영역이 아닌가하고 손사래를 쳤는데,

"꼭 혁명가만이 진정한 (비소유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공산주의란 사유와 이윤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과 독점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거리 두기", 상대화, 궁극적으로 소멸 작업을 해야 할 듯합니다."

이 구절을 보니 자못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소유와 비소유라는 세속적 사랑의 잣대를 떠나- 바디우를 빌려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로서의 사랑'과 공산주의적 혁명이 결국에는 동일한 문제라고 설정하는 것. 진정한 공산주의자적 면모란 바로 이런 것임을 상기해두자.



-나는 간명하게 글을 쓸 줄 모른다. 글쟁이의 소양같은게 내겐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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