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말'에 해당되는 글 67건

  1. kaskade 2010.05.03
  2. <더러운 철학> 2 2010.04.27
  3. Sviatoslav Richter 2010.04.05
  4. 20100326 2010.03.26
  5. 맑스 출현 이전의 사회이론과 현대시민사회의 형성 2010.03.25
  6. - 2010.03.22
  7. <근대문학의 종언> 단상 2010.03.09
  8. - 2010.02.21
  9. - 2010.02.11
  10. 20100208 2010.02.08

kaskade

from 짧은말 2010. 5. 3. 16:16










데드마우스의 리믹스로 더욱더 유명세를 탄 i remember의 도입부와 비슷한(거의 같다) 곡이 수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전작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은 듯한 kaskade의 신보.
섣불리 도전을 감행하기가 힘든 것이 기존의 라운지 음악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kaskade의 서정적인
멜로디컬함은 그러한 실험정신이 가미되지 않아도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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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철학>

from 짧은말 2010. 4. 27. 14:06




세상에 더럽지 아니한 것이 없나니 -<더러운 철학>, 김진석

단순히 책을 읽고 텍스트를 해석하고, 또 생산하는 일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할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며 동시에 직업적 철학자로서의 자기검열이 낳은 양심적 진술이라 할수 있다. 철학의 소용을 논하는 텍스트의 일례를 드는 것은 비근할테지만, 철학의 더러움을 이토록 치열하게 고발하려는 학자가-강단철학자들 내에서-몇이나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가 상정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자리에 김진석 그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아니, 어떠한 관념론적 해석도 허용치않는 그의 입장을 견지해본다면, 그는 필히 지식인이라는 타이틀에 매겨지는 자리지움 자체를 거부할 터이다. 그렇다면 그를 어떤 주체로, 어떤 철학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엉뚱하고 삐딱하고 우스운 행동들을 통해 심오함을 찾는 주체, 기꺼이 더러움을 무릅쓰고, 더러움에 빠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철학자의 초상으로서 김진석을 소묘하는 것이 가장 적확한 묘사가 아닐까.

김진석이 철학이라는 부단한 분과 학문의 이름앞에 더러움이라는 형용사를 나란히 진열하고자 함은, 오늘날 철학이 온갖 부조리하고 구차하며 진부한 것으로 가득찬 세계의 외연과 내포에 대해 침묵하고, 보편적인 원칙과 이상의 순결함만을 추구하는 위선을 폭로하고자 한 비판의식에서 비롯한다. 철학이 더이상 제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세상의 변혁을 일궈내기 위한 단초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을 조장한 것은 철학교수들에게도 책임이 있으며, 이러한 위기에도 자성의 목소리는 함구한채 철학교수라는 세속적 지위를 누림으로 자신의 철학함을 인정받는 강단철학자들의 철학 근본주의적 태도에 관한 극렬한 추궁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지적이다. 철학이 현실에서 제대로 용해되지 못하고 개념적인 이론의 정립에만 천착하는 실태에 관한 신랄한 비판-그런데 철학의 효용에 대한 고민이 철학의 중요 과제가 아니었던 적이 있을까?-또한 정당하다. 다만, 내부고발자의 스탠스에서 철학의 효용과 철학교수들의 무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혹은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더러움을 무릅쓰고 그것의 벌건 속살을 면전에 들이미는 모양이 다소 강박적으로까지 비춰지는 위험을 감수하며, 이러한 비판적 논조를 펼치는데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난점이라면 난점이다. "오늘날 철학적 태도가 필요한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철학이 필요하고 이로운 것일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탈주를 사고할 수 없게 하는 자본주의적 굴레 내에서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주지하도록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보다 실천적이지 않을까. 철학에 관한 강한 회의감의 표출은 그의 니체주의자로서의 면모마저 들추게 한다.

그런데, 뒤를 이어 "이제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개념적 작업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라고 기술한 단락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겨냥하고 있던 진정한 대상이란 근본적인 성찰이란 의미에서의 철학하기의 쓰임새가 아니라 초월적 사상의 관철을 위한 이론놀음의 영역에 머무른 채로, 앎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메꾸지 못하는 철학교수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실제로 대학 내의 나이 지긋하신 철학교수들의 폐쇄적인 학문적 지평과 문화비평이나 정신분석, 사회과학 등의 다른 분과학문과 철학과의 연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현실태를 상기해보면 한국 철학의 위기를 초래한 혐의에서 철학교수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가치가 대학 내에서, 사회내에서 소멸하는 것을 운지하고 있음에도 세속과 거리가 먼 학문적 정전만을 고집하고 있는 구차하고 뻔뻔한 태도의 철학하기의 형상을 김진석은 더럽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학자들이 강구할 수 있는 자구책 중 하나로 김진석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철학을 현재의 문화적 맥락에서 사고하고 논의하자는 방법론이다. 철학이 고취하던 전통적인 인문학적 기치에서 벗어나, 메타영역으로서의 문화가 구축해나가는 새로운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의 출현들을 설명해냄으로 구체성을 획득하고 학문적 유효를 승인해내자는 것이다. 문화 내에서 인문학이 재편되고 복속되는 것으로 결부시킬 것이 아니라, 문화의 모호함이 투사하는 세계의 얼굴을 철학이 직시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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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viatoslav Richter

from 짧은말 2010. 4. 5. 14:31





Bach Fantasia & Fugue in A Minor






가슴은 우선 즐겁기를 바라지-
그리고- 고통의 회피를-
아픔을 마비시키는 저 하찮은 진통제들을-
그리고선- 잠드는 것을-
심판관의 뜻이라면 죽음의 특권을-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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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6

from 짧은말 2010. 3. 26. 14:44



우파 아나키스트라는 부류에 자신을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큰 영광일거라는 우엘벡의 발언은 공공의 적을 자처하는 한 무정부주의자의 지나친 솔직함이 배태하는 카타르시스 외에도 어떤 아이러니한 울림이 거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울림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수평선상에 위치한 두 기표를 함께 나열시킴으로, 자신은 양자에게 모두 유연한 태도로서 불화를 조율할 수 있다는 교묘한 위선을 가장했던 누군가의 초상을 뇌리에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사실인즉, 모든 새로운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조직과 프레임, 제도를 거부함과 동시에 권력의 외부에서 평등을 부르짖는 무정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이 과연 합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바쿠닌과 프루동을 대처나 레이건, 부시 등과 한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불일치하는 두 이데올로기를 모두 떠안음으로 생겨난 분열과 모순 외에는 어떤 식으로도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우엘벡의 외곩수적인 기질에서 우엘벡식의 우파 아나키스트는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68년도 5월, 유럽을 휩쓴 성의 해방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립이라는 변혁의 물결이란,  동물적이고 폐쇄적인 성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한 젊은 층의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했으며, 이 명백히 자본주의스러운 운동은 점차 현대문명을 동물의 왕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이러한 퇴행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종교적 절대성을 호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68의 유산이라 일컬을만한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그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스러운 이념을 배아시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종 글쓰기가 고통인가 아니면 쾌락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느낌으로부터 생겨나는 뭔가 다른 것 말입니다. 어쨋든 극도로 신경질적인 흥분 아니면 곧 진력이 나는 기분의 고양이 그것입니다-
- 나의 글쓰기는 길 위에서 자전거를 달리게 하고, 심연을 스치기는 하되, 그렇다고 그 심연으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작업의 연속입니다. 정말 진저리 나는 직업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작업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우엘벡

-가장 정확한 사유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틈새, 빈터, 빛의 화살 속입니다!-
-문학인가, 삶인가? 문학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는 겁니다. 나에게 삶은, 내가 이 삶으로부터 언어를 끌어낼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심오하게, 그리고 육체적으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
-시니피앙의 창백한 모습, 말의 섬세한 짜임새 같은 것 - 레비



나의 경우, 글쓰기란 볼썽사납게 돋아나있는 감각의 촉수들을 마모시키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사정없이 절개된 문장 발밑으로 끝없이 쌓여있는 감각의 잔여물에 매몰되어 그저 잦아들고싶은 것 뿐인 충동이다.  글이나 언어로 극복되는 고뇌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성마른 단어들이 응결하는 그 짧은 순간에 찾아든, 형용불가능한 감정의 일회적인 해소에서 비롯한 미증유의 안식일뿐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고뇌는 다시금, 무한한 언어의 지평 위에 군림한다. 무의식중에 써갈겨간 텍스트를 읽는 것은 당시의 지난한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다. 심화와 일시적인 해소가 반복되는 순환의 회로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경우의 수란 또다시, 있을 리 만무한 미래의 편린이다. 언어의 확실함만이 영원을 담보한다. 이것 외에,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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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민사회의 형성

1. 맹아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은 1200년대 중세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중세도시의 형성 이후에 융기
당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베니스의 소상인들-시민citta들의 지배계급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적-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 그 기원이 있다.  
2. 이행기 
후기 르네상스의 이태리 거부 메디치 가는 부의 축적으로 지배 계층에 군림하게 되고 곧 피지배/지배라는 계급의 분화에 일조하게된다. 마키아밸리의 통치술으로 강고히한 권력.
3. 고전적자본주의
후에 지중해 상권이 몰락하고 대서양 상권의 부상으로 산업자본주의의 영국이 위세를 떨치게 된다. A.smith 국부론-  상업 아닌 공업이 국부를 축적한다 .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4. 제국주의
계급투쟁보다 사사갈등이 심화.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은 협심하여 타 국가의 자본과의 투쟁
5. 복지 자본주의
아젠다-의제-의 출현
6.신자유주의

시대의 전환은 모순을 내재한 사회적 갈등이 그 동력으로 작동했기 때문

사회계약이론

현대 사회의 본질적인 성격을 설명하려는 사회이론적인 작업은 사회계약론에서부터 시작. 홉스,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 등의 모든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연상태/사회라는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홉스-'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간들 내의 갈등의 충돌을 해결할 방법론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사회를 성립하는 것을 채택한다. 여기서 사회 성립의 요체는 갈등을 컨트롤하는 권력의 담지자인 정부,국가의 존립여부에 있다. 여기에서 사회계약론은 사회 성립이 정치적인 수준에서 사고됨을 알 수 있다. 자연상태와 대비되는 사회는 시민사회로, 다시말해 시민사회를 근본적으로 정치사회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사회계약론에서의 자연 상태는 원시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노동을 하고 노동의 결과인 생산물을 사적으로 점유가 가능하고, 또 소비하는 상태로 묘사되고 있다. 요컨대 사회계약론에서는 인간의 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를 자연 상태로 간주한다. 경제적인 것이 사회 성립의 조건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았다. 경제적인 활동-자연상태, 사회-정치사회 /전근대적인 시각의 사회의식. 사회의 구성을 정치적인 것에 발견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police에서부터 시작된 유럽의 전통적인 사회의식에 해당된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스-정치사회 폴리스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이고 폴리스 즉 사회는 정치적으로 결합된 결사로 이해. 정치사회,국가=시민사회. 폴리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당시의 사회현실과 상응한다. 경제적인 활동은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시민들이 아닌 노예들의 경제활동은 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경제적인 생산활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행위로 천시되었다. 아고라나 의회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이 시민이 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시민의 사회는 정치사회로 이해되었다.

사회계약론으로는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을 파악하기에 무리가 있다. 현대 시민사회의 근원적 성격은 헤겔에 이르러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었다. 헤겔에 와서야 시민사회와 국가의 동일시는 파기되고, 시민사회는 경제적 활동의 영역 즉 경제사회로 설정된다. 사회 성립의 요건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것으로 전치된다.
헤겔의 시민사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노동하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상호관계에서 형성된다. 시민사회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합, 욕망의 체계로 규정된다. 헤겔에 이르러 경제적 활동이 사회의 구성적 요건의 자격을 획등하게 되며, 시민사회는 경제사회로 파악된다. 시민사회를 본질적으로 경제사회로 파악하는 헤겔의 시민사회관은 맑스에게로 이어지고 맑스는 더 나아가 경제적인 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회 성립을 설명하려는 철학적 이론화, 즉 사회와 역사의 유물론적 설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맑스의 기본적인 시각은 역사 유물론의 출발 -우리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은..현실적인 개인들 그들의 행동 및 그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들이라고 설정하고 있는데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시민사회를 본질적으로 경제사회와 동일시하는 것은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며 그것은 비단 맑스의 역사유물론만의 예외적인 견해가 아니라 헤겔 이후 현대 사회이론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획득된 일반적인 통찰이자 이론적 성과이다. 따라서 맑스의 경제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확장하여 시민사회가 경제사회라는 것까지 문제시한다면 이는 현대 시민사회의 구성적 본질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람시의 시민사회에 대한 논의도 경제사회로서의 현대시민사회의 본질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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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3. 22. 00:35



어떤 나락이 눈앞에 있다. 신들의 황혼이 물러간 자리, 그 붉은 그림자가 무겁게 늘어진 곳에서 그것을 목격한다. 그 나락을 불러들인 것은 지겹게도 나를 몰아부치던 유년기의 방종이다. 조금도 진화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듯, 어릴적의 히스테리컬한 방종을 여전히 고수하는 주의주의적 태도를 영위할 때,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고 믿었다. 그 종교적 맹신에 가까운 강박과 정념을 계속해서 고집하는 것만이 구원과도 같은 생명줄이었으며 유일한 열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염원으로서의 세속적 윤리를 거부하고, 또 거부하는 심리란 무슨 거창한 대의를 위한 신념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제도에의 복속은 곧 결박임을, 체제 여하의 규율화된 삶의 미덕이란 얼마나 기계적인지를, 또 얼마나 상투적이고 구질구질한 것인지를, 머릿속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마냥 그것을 뼈저린 혐오와 회의의 감정으로서 체화해버린 까닭이다. 교리처럼 이 땅에 주어진 질서의 바깥에서, 반사회적인 비현실주의자라 이름지워질 결벽을 움켜쥔 채로, 그것에의 집착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곧 한줌의 공기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으로의 방류됨을 의미한다. 아. 그래서 여기 나락이 눈앞에 있다. -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매우 실존적인 잡놈이다- 허연의 고백은 채 막을 수 없이 터져나온 각혈이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닥 마디마디 사이로 흘러나온 시인의 피는 더이상 붉지도 않다. 스러진 것은 시인의 언어, 영원한 것은 그저 물질적인 것의 고스란한 모양새뿐이다. 물질이 보장하는 불변함과 확실함에 매달리는 처사가 단지 사랑을 얻기 위해서 라는 것이 그 이유라면 그것은 차라리 도덕적이다. 차라리 윤리적이다.




"처녀의 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가는 세상과 흠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과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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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락하는 것들이 역사의 뒤안길 너머로, 그것이 갑자기 도래했던 과정만큼이나 재빨리 퇴장하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문학의 종언이니, 지식인의 종언이니 하는, 근대를 지배했던 이념의 종식을 단언하는 테제들이 산적하고, 그 언설들의 실질적인 효용을 가늠코자 하는 2차 컨텍스트가 홍수를 이룬다. 그 컨텍스트는 소멸이 선언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존재의 위용을, 그 형용모순되는 존재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들일 터이다.  내면으로 침하되어 그 감각적 결을 어루만지는데 열중하던 근대 문학은 자취를 감추었고, 더이상 사람들은 리얼리즘에 천착하는 문학을 소비하지 않으며, 그것은 곧 종말을 맞았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더이상 문학을 논하지 않겠다' 라고 피력한 평론가의 테제가 양산하는 담론이, 그것이 선고된지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란의 장에 위치해 있는 것은 <근대 문학의 종언>이 함축하는 예술의 종언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문단과 평단의 생산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들 존재의 파기를 암시하는 묵시록적 예언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들은, 문학이 일종의 혁명적 가치를 적재하고 있으며, 오성과 감성을 중재하는 상상력의 가능성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어떤 불가피한 믿음을 여전히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선언이 유효하다고 판정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감히 말하기를, 작금의 문학은 통상적으로 역사적 형식에 포획되기를 거부하는, 탈구축된 문학이다. 근대성이 완벽히 소거된 문학, 온 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역설하려 드는 문학. 오늘날 한국에서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김연수의 소설에서 자기위안을, 신경숙의 소설에서 계산된 신파를, 박민규의 짐짓 청신해뵈는 스토리텔링이 차마 은폐하지 못한 진부함과, 이 모든 풍속적인 문학들에 '성찬'이 즐비한 평론을 조공으로 바치며 공생하기를 자처하는 평단과 문단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사실인즉, 이것이 오늘날의 예술임을, 아니 이러한 '예술'을 부정하는 제스처란 과거에의 신념을 고집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답적인 이상가라는 정체성을 간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고하건대, 나는 시대의 낙오자라는 딱지를 이마 한 가운데 부착하기를 주저않는 인간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전근대적인 이념에 유착해있는 인간들에게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마치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한 추도문처럼 읽힌다.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대안으로서의 문학이 그 기력을 소진하여, 그것이 지양하고자 했던 보편적 기치에 '전복되어야 할 패러다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마저 달린 채로, 단지 자본의 하부구조 역할을 수행할뿐인 문화에 자리를 내어주고는 쓸쓸히 퇴장당하는 정경. 그것을 위한 추도문. 

  

 -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떄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중략.. 다만 문학이 영원하다고 생각한 시대가 있었던 것은 왜일까, 그리고 그것이 사라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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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2. 21. 00:01




메일을 썼다가, 지웠다. 블로그의 글도 언제나 썼다가, 지운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읽어보면 그 유치한 감성에 쥐구멍에라도 숨어들고픈 심정이 들것이란걸 알기 때문이다. 이것도 쓰여졌지만 곧 지워질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쓰여졌다가, 지워지고, 잊혀지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영원을 찾고자 해서 입게되는 상처에는 딱지조차 얹히지 않는다. 엄벌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하등한 인간이 넘본 댓가다. 관성적으로 영원을 꿈꾸는 것에,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는 둥, 망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인식하라는 둥, 두려움에 맞서라는 등의 그 또한 인간이 설정한 팩트에 불과한 것인 주장을 들먹이는 이들은 외려 자신들에게 상상력이 부재하고 있음을 '영원히'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화된 영원을 말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으로 자리매김당하는 현실에 상처입는건지, 인간은 누군가와의 영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진실 앞에 상처입는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누군가에게 영원을 말하기 전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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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0. 2. 11. 20:57






펜듈럼 신보 릴리즈 커밍순




알렉산더 맥퀸이 목을 매 죽었단다. 그의 오띠꾸뛰르는 이제 전설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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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from 짧은말 2010. 2. 8. 16:24

글쓰기에 의해 고뇌를, 불안감을 도려내고 자기 구원을 도모한다는 카프카의 일련의 작업은 얼마만큼이나 그 자신에게 유효한 효과를 산출해내었을까. 겹겹이 쌓인 점층적 배열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시시때때로 조제되는 환멸의 감정들. 마모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날이 서리는 것. 그야말로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인데, 가야할 길은 까마득하니 도달할 수 있을것 같지가 않다. 반복되는 유희와 절망만이 산적한 그 과정은 가히 사드마조히즘적인 형상을 띤다. 두렵지 않다고 해서 아프지 않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 지혈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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