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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101130 2010.11.30
  10. 글로벌개더링코리아 2010 2010.10.14

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from 짧은말 2011. 6. 20. 12:39

 





 -기나긴 고난의 경로를 통과한 후에야 구원은 온다.
이런 연유에서, 디스토피아는 희망의 역설적인 비전으로서 끊임없이 제시되는 것이다.





-우스개소리로, 박노자가 급진급진 열매를 먹었다고 하는데 그건 새삼 맞는 말일듯싶다. 2년전만해도 그는 차악으로서의 사민주의를 옳다고 여겼다.  혁명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서서 이 폭력을 피부로 체감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급진적인 태도를 경계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아마도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에 이주하게 되면서 선진 노르웨이 내에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모순들을 적시하기 시작했던 모양. 여튼 그가 최근에 올린 포스트를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35697 보니 며칠전 누군가가 내게 건냈던 말이 생각이 났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럼 서로의 연인조차 공유하게 되는 거냐고 묻길래 그건 사적 자유의 영역이 아닌가하고 손사래를 쳤는데,

"꼭 혁명가만이 진정한 (비소유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공산주의란 사유와 이윤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과 독점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거리 두기", 상대화, 궁극적으로 소멸 작업을 해야 할 듯합니다."

이 구절을 보니 자못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소유와 비소유라는 세속적 사랑의 잣대를 떠나- 바디우를 빌려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로서의 사랑'과 공산주의적 혁명이 결국에는 동일한 문제라고 설정하는 것. 진정한 공산주의자적 면모란 바로 이런 것임을 상기해두자.



-나는 간명하게 글을 쓸 줄 모른다. 글쟁이의 소양같은게 내겐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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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6. 4. 02:27

폐관수련이 필요하다. 트위터도 안부를 확인하는 용도로만 쓰도록 자제하는 것이 좋다. 나의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착종된  파토스는 온전히 나만이 감당해야할 것이다. 모든 것이 지리멸렬한 밤. 착잡한 심정에 으레 찾는 책은 미니마모랄리아.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세상의 균열과 부조리와 고통과 슬픔과 우울을 전시하며 단번에 나같은 부류들을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과 연루시켜버린다. 그 특유의 견고하고 단조로운 문체는 담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동원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 수사로 이해되는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슬픈 관조와 세상과의 거리두기.

" 반면, 억압받는 계급의 언어에는 지배의 상흔만이 새겨져 있다. 불구화하지 않은 자율적 언어가 사사로운 원한 감정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불편부당함을 약속해준다면 억압된 계급의 언어는 그러한 불편부당함이나 정의로움을 박탈당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에 의해 씌여진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언어를 씹어 먹는다. 그는 사회가 거부하는 강력한 자양분을 언어의 객관적 힘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깨물어 먹을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을 언어로 가득 채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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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6. 1. 11:22

1.가끔 마음을 다잡는다고 걷어낸 절망은 완전소멸에 이르지않고 끊임없이 주변을 배회한다.
그러다 외압을 감당치 못한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목격된다. 
푸른 재로 산화한 그것을 차라리 내 한낱 죽음충동에 불과한 파토스에 대항하는데 실패한,
무참한 항거의 흔적이라 부르련다.

말간 허무와 공허를 곱씹는 것에 골몰하는 자세는 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의 신경증을 견디는 나름의 삶의 형식이다
그래서, 나는 이 미친 세상을 아무렇지 않게 긍정적으로 살자라는 구호를 무슨 종교적 교리마냥 외치고 다니는
사람을 마주할 때 참을 수 없도록 구역질이 난다. 계급적인 것을 가감하고 진정한 인간의 평등을 좌시하자라는 이상적인 언어를 외치고 다니는 사람도 참을 수 없다. 나는 이만큼 가방끈이 길고 개념있는 인간이야 라고 여봐란듯이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에 관하여 구구절절 써내려가지만 그 이면에 가득찬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과 병적인 성적 취향과 저급한 오만과 비열함. 나는 썩 괜찮은 인간이죠라는 것을 계속해서 남에게 주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적인 허영.

이 모든 구역질이 치미는 것들.  나는 이에 대한 결벽증을 감내하지 못하고 언젠간 스스로 사회와 인생에서, 퇴장하게 될 것이다. 알 수 있다..


우엘벡이 너절하고 도저한 허무적 독백들을 늘어놓는 가운데, 그가 한사코 움켜쥐고자 한 무언가가 있다.
 당신과 내가 끝까지 경험할 수 없을, 끝까지 내 것이 되지 않을, 공백없는 진리와 완전한 인간의 감정. 
그 진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말자. 



2. <무산일기>에 관한 평론가들의 한 줄 비평 중 인상에 남았던 말. "화면이 암전될 때 마음도 암전된다"
검은 화면 속, 소리없는 통곡과 분노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그것은 귀를 막아도, 막아도 스며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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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5. 17. 00:56




- 아무 힘이 없는 아름다움은 지성을 증오하는데, 왜냐하면 지성은 아름다움이 행할 수 없는 그것을 아름다움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파괴되는 것을 철저히 막는 생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생이야말로 정신의 생인 것이다. 정신은 오직 절대적으로 찢겨져 있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은, 어떤 것에 대해 우리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나 거짓이다. 이제 이로써 이것에 대해서는 다 마쳤다"라고 말하고서 그로부터 다른 어떤 것으로 넘어갈 때처럼,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으로서의 이런 권능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대면하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통해서만 이러한 권능인 것이다. 이 머무름은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꿔놓는 마력이다ㅡ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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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3. 13. 00:59


마음의 적을 둘 곳 없는 자에게는 글쓰기만이 영원한 고향이다. 날씨가 변할 즈음이면 으레 찾아오는 새로운 우울은 결국 나를 무감각한 인간으로 숙성시켰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감각의 둔화가 불행한 것만도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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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3. 3. 11:02



" 이런 밤, 여기 실존하는 자연의 내부-self-는 환영적 표상들 속에서 주변이 온통 밤이며, 그때 이쪽에선 피 흘리는 머리가, 저쪽에선 또 다른 하얀 환영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가는 또 그렇게 사라진다.....

 무시무시해지는 한밤이 깊어가도록, 인간의 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밤을 목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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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 19. 13:53




누군가를 착취하는 것으로 황금으로 치장한 궁궐같은 집의 주거권을 획득하는, 그런 꿈같은 시대를
너는 나락 어딘가쯤을 하염없이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아마도 언젠가 시가 역사의 알레고리었던 적이 있었고 눈 먼 유토피아를 꿈꿨던 적이
있긴 할 것이다. 오늘날의 언어처럼 경색된 채 자기 세계에 침윤하기를 고집하는 미래는
예상 바깥의 것으로, 너는 너의 적을 어떤 소명에 위치시키기 위한 제스춰만을 그렸을 것이다.
비극은 탕진되고 유희는 켜켜히 쌓여 권태로움만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행복을 투여하여 감각이 마비된 배부른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소음이 사방을 에워싸고
바다건너 어느나라 총리가 어린 여자애들을 돈으로 유린했다는 염문들이
망막에 새겨졌다가 이내 소리없이 은폐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장하는 것이 꽤나 그럴싸한 이데올로기적 전략이 되는 풍경을
인간, 너는 감히 생각이나 해볼 수 있었을까

진보와 퇴보를 진언하는 이념들이 마구 뒤엉켜있는 와중에도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태연하게 방금 섭취한 짐승찌꺼기들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그리고 너는 야만의 혓바늘이 촘촘히 들어찬 그 한자락을 차지하고 서 있다.

1927년의 그 어스름한 저녁에 파리 거리를 배회하던 어느 망명자의 우울함이 발산하는
고통의 심연을 흐릿한 눈으로 읽어내릴 때 네가 감지해내는 것
그 멜랑꼴리가 너를 견디게 해주는 일말의 위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한심한 작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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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는 시대를 타고난 인문서적이다.


신년을 눈앞에 두고 한 해를 결산하는 기사가 속출하는 와중에, 2010년 출판 시장의 동향을 분석하고 있는 글의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책을 꼽으라면 그 책은 누구나가 예상하듯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될 것이다. 50만부를 웃도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기록적인 판매 성과와 언론에 수도없이 회자되어 기어코 대통령마저 여름 휴가에 읽는 책이라고 언급한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의 성공신화의 저변을 구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모습은 그리 요원한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온갖 석학들과 지식인들의 좌담에서 그들은 입을 모아 <정의란 무엇인가>의 성공은 우리 사회가 이제 정의라는 가치를 호출하고 있다라는 현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목적론적 결론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담론을 좀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예컨대 오늘날 정의란 개념은 무엇에 인준해야하는가 혹은 무엇에 정초해야하는가로.  <정의>란 가치가 함의하는 윤리적 외피만를 긍정하여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선에 기초하는 정의 관념이 시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주축으로, 우리는 사회에 질의해야한다. 북모닝CEO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쏟아지는 세간의 성찬과는 차별화를 두고 샌델의 정의론을 좀더 다차원적인 정치철학의 시각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과연 정의로운가

이미 북모닝CEO에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한차례 다룬 적이 있고 하니 똑같은 내용을 읊음으로써 지면낭비 하지 않기 위해 샌델의 정의론에 관하여는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21세기식 계승자인 샌델은 철학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예시들을 사례로 들며 공리주의, 자유주의 등의 개념들을 비교서술하다 결국 공동선을 위한 정의관을 주창하는 것으로 책을 끝맺음한다. 샌델이 추구하는 정의론은 도덕과 시민 의식에 입각한 공동선과 정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치조차도 종교와 도덕적 이상과 미덕을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가 규정하는 도덕이 과연 보편적 진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해봐야 할 것이다. 일례로, 낙태와 동성애 결혼의 합법화 등의 안건에 대해서 여러 공동체들은 이념에 따라 각기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다. 여하한 도덕 담론에 관하여 정치가 개입하는 것은 도덕담론이 공론화의 장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 효과를 넘어서, 개인의 신념을 국가와 법이 좌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거라는 비관적 전망을 피해갈 수 없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원제-straw dog's)에서 그레이가 소개한 일화를 들어보자.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 열여섯 살짜리 수감자가 간수에게 강간을 당했다. 아침 점호 때 모자를 쓰지 않고 있는 사람은 즉시 총살당한다는 규칙을 아는 그 간수는 강간당한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다. 그가 총살당해 죽고 나면 강간 사실을 덮어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 수감자도 모자를 찾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고 있는 동료 수감자의 모자를 훔쳤고,살아 남아서 이 일을 밝힐 수 있었다. 동료 수감자는 총살당했다"

이 수감자에게 공동체적 정의를 물을 수 있을까?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의 세례를 받은 염세주의 철학가 존 그레이는 정의란 관습의 산물이며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극히 시대적 통념과 연계하는 가치일뿐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소 거칠지만, 도덕조차도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라 명명할 수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의 정의란 더더욱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공동선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윤리

 사실 우리는 철지난 공동체적 기획을 견지하면서 지금, 정의란 개념을 너도나도 부르짖고 있는 격이다. 마이클 왈저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저, 그리고 샌델의 공동체주의가 출범한 시기는 롤즈 식 자유주의가 횡행하며 윤리보다는 개인의 자유에의 옹호가 우선시되던 시기였고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미국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이론으로써는 분명히 유효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에 공동체주의 이론이 적용 가능한, 실효성 있는 이론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한국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보다 선행하는 사회이다. 공동체의 질서가 개인을 기각시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진대 여기서 더더욱 공동체의 윤리를 주장하는 샌델의 이론이 과연 적실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가 기각하고 있는 것을 재고해야함이 옳지 않을까? 우리에게 부재하는 것, 그것은 장정일의 서평에서 그가 운을 띄웠던 안티고네의 윤리, 주체의 윤리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는 테베의 오이디푸스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녀의 형제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오이디푸스의 저주대로 서로 싸우다 모두 죽고 말았다. 테베의 새 지배자가 된 숙부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리네이케스는 역적으로 취급하여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으며 그의 시체를 내다버리고 장례도 치루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령을 내림에도 안티고네는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고 장례를 치루었고 이에 분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 안티고네는 감옥에서 끝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은 안티고네를 따라 목숨을 끊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왕비도 세상을 뜨고 크레온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여기서 안티고네는 크레온이라는 도시 공동체의 질서에 저항하는 주체이다.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장례를 치뤄주고자 하는 자신의 윤리를 거리낌없이 실천하는 숭고한 주체. 샌델의 공동선에 입각한 정의론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윤리는 욕망에서 출현하는 윤리이므로 정의에 거스르고자하는 윤리일 것이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안티고네의 윤리야말로 국가와 공통 도덕으로 형상화된 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라고 지적한다. 공동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는 우리의 윤리를 그것이 진리인지도 파악이 불가능한 공동체적 가치를 위하여 제거함이 정말 옳은 것일까. 하지만 안티고네의 행보- 윤리의 실천이, 크레온- 잘못된 법질서를 붕괴시켰다는 결과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로운 정의론을 요구하자

샌델의 공동선을 위한 정의론이 다원화된 현대의 사회를 정의라는 가치를 무기로 통일된 하나의 사회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샌델이 간과하는 또다른 진실은 다양한 공동체들간의 공존할 수 없는 이념의 차이가 실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정의라는 추상적인 가치가 포섭할 수 없는 차이이다. 이런 현실태를 직시해냄함과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정의론을 모색하여야한다. 우리는 어쩌면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보다 구체적인 정의론에서 답을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화하는 우리의 세계와 격동하는 변화에 부합하는 정의의 원칙을 새롭게 정식화하고 있는 프레이저의 이론은 도덕적 딜레마를 공동체적 차원에서 해소하려는 샌델의 협소한 정의관에서 추출하기 어려운 정의론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이례적인 성공을 단순히 사회에 만연하는 부도덕에 질식사하던 대중들의 일시적인 심폐소생술, 혹은 죽어가는 인문서적 시장의 기사회생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이 책의 성공신화가 투사하고 있는 것은 점점 사회가 인문학적 가치에서 어떤 탈출구를 탐색하려는 시도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주지했듯이 서구이론의 수용에 있어 우리의 현실에 적실한지를 판정하는 제스처가 선행되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용은 옳지 않다고 서술했으나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정의'를 호출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성찰을 위한 긍정적인 청신호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북모닝CEO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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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30

from 짧은말 2010. 11. 30. 18:30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살고 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전락하는 것들에 대한 매혹과 동요를 떨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막을 내리고 모든 세속화한 희극만이 상연되는 현실에 치를 떨면서도
이 전락의 미학에 온 감각이 매몰됨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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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개더링코리아 2010

from 짧은말 2010. 10. 14. 23:12




저스티스, 펫보이슬림, 아민 반 뷰렌 영접 ㅋ
저스티스는 기대보다 쏘쏘 였고 펫보이옹은 연륜덕인지 생각보다 흥했습니다.
작년보다 추웠던 덕에 아민은 30분 정도 보다 나와버린게 아쉬웠음.
작년 라인업도 좋은 편이었는데 올해는 하루만 진행되는데다가
라인업이 저렇다보니 관람객이 두배는 몰려온 듯.
덕분에 500원짜리 생수를 2000원에도 사 마시고 맥주는 사 마실 엄두도 안나고
여기저기 쓰레기는 넘쳐나는데다가 완전 상거지페스티벌이긴 했습니다.
펫보이의 흥한 디제이덕에 진행이 개차반이었던건 상쇄가 좀 되긴하지만 내년에도 이따위면 참 답없네..
 
저스티스가 생각보다 별로였던 것이 이게 디제이셋이었기때문이겠지..ㅜㅜ
라이브 동영상보면 진짜 흥한데 말입니다..
여하간 없는 돈에 가족카드-_- 하나 있는거 긁어서 간 것. 뽕은 뽑고 왔었어야됐는데.
이제 늙었다고 새벽 강바람 맞는 것도 힘들고 허리도 아프고
구두신은 발도 아파서 아민 끝까지 못보고  고 홈 할 수 밖에 없던게 아쉽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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