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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정명훈 비판에 부쳐. 2012.03.06
  8. 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2012.02.10
  9. . 4 2011.12.29
  10. . 201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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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6. 30. 01:02

 

 

 

 

 

 

"...우리 문명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아직도 살인을 실행하고 사실상 살인을 명령한다." -프로이트

 

 

-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적 경구,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라는 주장이 현대에 이르러 역설적인 부활을 꾀하고 있음을, 그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활자에서부터 브라운관으로, 스크린 너머로, 모니터 너머로까지 확장된 유혈 낭자한 컨텐츠와 예술, 그리고 우리의 삶을 떠올려보라. 연쇄 살인마를 다룬 스릴러 영화와 추리소설, B급 고어물과 스플래터 무비, 최근 들어 브라운관에까지 등장하기 시작한 좀비 드라마의 출현은 우리의 일상을 자극하는 유희의 스펙터클이 된지 오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좀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뉴스를 타전받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삶이 예술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모방은 점점 더 잔혹한 방식으로 현상하는데 몰두한다.

 

- 우리는 정상성의 기준을 바로세워야한다.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인 험난한 지형의 생태계를 아슬아슬하게 버텨나가는 오늘날의 인류에게 세계는 불가해한 상식을 요구한다. 당신은 사회의 구성원이자 구성원이 아니라는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복무할 것. 더이상 세계의 지침에 의존하지 않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상인이다. 원자화된 근대의 인간, 추락하는 경제지표는 나의 주머니 사정과 관련해서만 의미있는 것이고, 바다 너머 어디선가 전쟁의 포화에 희생되는 누군가가 있음 따위가 나의 단잠을 방해할 요소가 되지 못하는, 철저히 사회와 유리되어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전통적인 의미의 정상인이다. 사회는 어딘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강박증자, 신경증자, 히스테리증자를 비정상인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정상인이라 불릴만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의 정신이 역사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온갖 유해한 것에 대한 중독,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무차별한 폭력 등은 세계가 처한 총체적 곤경에 대한 징후이다. 이 징후를 대변하는 자들이야말로 정상인들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영화 shame이 그리는 인간 군상의 형상은 어딘가 서글프다. 이 영화는 신체와 괴리된 정신의 항구적인 불능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계속해서 성을 구매하고 또 전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핍을 지탱한다. 물신화된 섹스라는 환상을 통해서만 그는 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다. 그는 누군가 말했듯이 "섹스 때문에 사랑이 불가능해진"시대의 전형인 것이다. 후에 그는 어떤 존재의 침입을 통해 수치라는 균열과 붕괴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영화에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를 모르는 자의식이 타인과의 마주침이 불러온 균열을 통해 어쩌면 떨어져나간 영혼의 재생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되었다는 것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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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6. 24. 20:25

 

 

  Andreas Gursky, Spectacular City, Düsseldorf,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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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스는 워노님의 협찬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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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4. 23. 15:59

 

 

 

-더이상 마르크스를 빌리지 않아도 되는 유물론적 감각은 이제 진화생물학자들의 것이 된 모양이다. 현재 영미권을 뒤덮고 있는 최신 문예이론의 경향은 이러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에 근거하고 있다. 문학주의자들이 이런 흐름에 동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인간의 이성이 건축한 문명이라는 바벨탑은 자연을 이미 벗어난지 오래라는 오만함이 저변에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모든 지식사회학이 자연과학과의 결합을 꾀하지만 이런 패러다임에서 문학만은 구해내어야 한다는 주장의 덧없음이 선취하려는 것은 문학의 실존, 더불어 문학의 쓸모일 것이다. 이데올로기 이상의 인간의 원론적인 그 무언가가 문학에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 붙들고 있는 죽은 문학의 시체에서는 더이상 부패의 내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시쳇말로, 오늘날의 '힙'함을 익히기 위한 첩경으로서의 피치포크는 음악의 도살장이 되어버린 것 같다. 과거의 영광을 업고 있을 뿐 인 뮤지션에게는 혹평을, 첨단의 유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한 신인에게는 찬사를 날리며 분류의 셈법을 선전하는 풍경은 여과없이 도살장에서 일어나는 도륙의 그것이다. 일단의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는 아티스트에게 도저히 한 표를 내어줄 수 없는 나는 사실 그닥 진보적인 인간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현란한 앨범자켓으로 한껏 자신을 치장한 음악들을 몇 개 클릭해본다. 그러나 플레이밍 립스도, 애니멀 컬렉티브도 도태된 나의 감각으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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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3. 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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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2. 3. 1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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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비판에 부쳐.

from 짧은말 2012. 3. 6. 13:34



Andreas Gusky. airport




역사상, 오늘날처럼 예술이 숭고한 위치를 점한 적은 없을 것이다또한 오늘날처럼 예술가가 합리적인 자본가의 형상을 띄고 비즈니스의 전략을 구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대를 살았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특성은 인간이 생존의 기술로서 자신을 디자인하게끔 만드는데 있다. 예술가만큼 자신을 '예술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랴. 이 디자인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는 동시에 자본가의 지위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무구한 그의 예술적 가치만이 투자가치가 있는 상품이다자본이 된 예술은 그의 비도덕적인 행보와 정치적 이념을 무화시킨다. 카라얀이 나치와 합작하였으나 그의 베토벤은 역사에 남은 것처럼. 예술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자본주의적 면죄부를 부여할만큼의 위상으로 승격하는데 성공했다.


백만장자 예술가의 본질?

김상수가 진보언론을 통해 제기한 정명훈 비판이 화제가 되었을 때 자유주의자 진중권은 그의 평상시 행보가 늘 그러했듯이 트위터를 빌어 '예술은 예술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정명훈을 방어했다. 뜬금없고 맥락 없는 발언이다그가 말하는 '예술의 논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
정명훈 가만 놔둬라. 그 만큼 잘났으면, 그 정도 받아도 된다. 예술가가 굳이 정치 입장을 물을 필요도, 그들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의 뒤이은 트윗을 보면 저 행간을 파악 할 수 없는 발언의 의미는 "예술은 시장논리로 값을 매기는 것이 옳다"로 읽힌다


그럴까? 예술은 경제적인 어떤 것이 된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예술본질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것이다. 예술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예와 기술로부터 벗어나 예술본질주의자들이 말하는 철학이 될 수 있었다. 근대 이전의 예술은 군주의 업적을 치하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기술이었을 뿐이다. 근대자본주의의 역사적 진행과 예술의 발전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 수공업자나 장인에 불과했던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의 살롱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초상화를 그려서 생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의 파고는 새로운 순수 예술을 개척하는 물꼬를 텄다. 

예술이 상품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다시 환기되어야 할 사실이 아니다. 예술과 예술의 외부, 그러니까 시장과 계급에서 분리된 예술이란 오직 시민적 예술에서만 그러하다. 예술의 자유는 시장주의에 대한 부정의 발현이지만 궁극적으로 상품 경제의 전제에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예술의 사회적 성격을 부정하는 순수한 예술 작품 또한 상품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후원자 제도가 예술가를 시장으로부터 보호해주던 18세기까지 예술작품은 상품이 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주문자나 그들의 목적에 종속되었다. 그 이후 예술작품이 갖는 무목적성은 시장의 익명성 아래에 은닉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들려준 짧은 일화를 떠올릴 수 있다.

"중병에 걸린 베토벤은 월터 스콧의 한 소설을 읽다가 "이 작자는 돈 떄문에 쓰고 있군"이라고 말하면서 책을 내팽겨쳤는데, 그 베토벤이 시장에 대한 극단적 거부를 내용으로 하는 그의 마지막 작품 현악 사중주곡을 매각하는 데서 보여준 노련하고 완고한 사업자적 풍모는 시민 예술에서 시장과 자율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예술의 형식은 사회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형식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 그 결과 상품과 생산력의 관계에 속한다는 점을 기만한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주의에 초연한 자세를 보이면서, 정신의 순수성에 집착하는 예술이야말로 고부가가치의 상품인 것이다. 

 사회적인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형식은 이것이 출현하게 한 상품 뿐 아니라 예술에도 드러나있다. 예술적인 작업은 언제나 사회적인 작업이며 사회적 노동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이러한 사회적인 합목적성이란 가상에서 자유로운 절대적인 상품이라 할 지라도, 상품 형식은 예술 작품 속에 끼어있을 수 밖에 없다. 상품은 타인에게 팔기 위한 것인듯 하지만 실은 독자적인 무엇이다. 즉 이를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는 한에서 독자적이다. 물론 절대적인 상품으로서의 예술은 이러한 상품 형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것이다. 하지만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이 시장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은 예술 작품이 생산 관계에 관여한다는 사실의 귀결이기도 하다. 마침내 합리주의의 가면을 쓸 수 있게 된 자본주의는 문화 산업이라는 장을 열어 예술이 상품 형식으로 오고가게끔 노골적으로 장려하는데 이르렀다.

우리에게 포르말린 속의 오브젝트로 이름을 알린 데미언 허스트를 발굴한 유대인 콜렉터 찰스 사치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작품 값으로 1억원을 쥐어주었다. 이 작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일까? 이러한 비즈니스 쇼가 있은 후 데미언 허스트는 곧바로 현대미술의 총아로 급부상하였고 그의 작품은 몇 십억을 호가하게 되었다. 변화한 자본주의의 문화 경제적 논리에 맞춰 자신을 디자인하고 포장한 예술가들이 데미안 허스트뿐일까? 마크 퀸, 제프 쿤스, 이제는 한풀 꺾였지만 중국 사회주의국가의 현대 미술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성을 양념 삼은 엔터테이먼트적 제스처로 억만장자가 된 헐리웃의 배우, 락스타, 뮤지션 등등.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명성과 자본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또 이들을 닮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들의 생산해낸 예술은 투자가치가 높은 금융 자본이 되고, 저작권이라는 지대로, 또는 탈세를 목적으로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던가? 이런 흐름에 저항하기 위하여 미술관을 뛰쳐나가 거리의 미술가가 된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뱅크시'의 작품조차도 수억원에 팔리고 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계급과 자본은 순수 예술과 관련이 없다는 것이 근대 예술의 주된 믿음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예술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개념을 옹호하면서 이에 대한 '가치'는 물적인 것으로 응답되어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모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은 정녕 경제와 분리되어 있는 지고한 어떤 것인가? 사적 소유의 일반적인 본질은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화된 현재를 사는 우리는 이것을 더더욱 피부로 체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물음에 대한 이상적인 답이란 차라리, 오늘날 예술이 경제적인 영역에 교묘히 섞어들어간 채 문화 산업의 수족으로  전락함을 인정하고, 이를 비판함과 동시에 시대의 진리를 초월하는 미적 이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칸트는 예술이 미적 이념의 표현이라는 이유에서 보편적 가치를 구가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셸링은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예술은 이 동일성이라는 철학적 진리의 기록이라고 했다.  칸트의 미의식에 깊은 감명을 받아 순수 예술에 절대적으로 헌신했던 프리드리히 실러는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이 아닌 엘리트 계층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에서 자유로운 계층만이 건전한 '미적 판단력'을 지닐 수 있으며 '노동하는 생활로 인해 완전히 파괴 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아름다운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피력했다. 그 시절은 인간의 이성과 정신적 내실에 대해 탐구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과연 실러가 주장한대로 예술 작품의 성공에 대해 허용할 수 있는 척도는 내적 완성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시대의 자장 아래서 살고 있을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예술과 철학이라는 거대한 진리의 이정표 뿐 아니라, 모든 정신이 서서히 무화되고 있는 시대 어디쯤인가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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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from 짧은말 2012. 2. 10. 13:08







                           
                               “우리는 항상 2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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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2. 29. 17:47

 




-모두가 허기진 세계. 적막한 귀가길, 골목을 밝히는 허름한 네온사인에도 매달리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검고 푸른 물 밑에 잠긴 너를 떠올리는, 잠들기 전의 짧은 몇 분 가량의 시간은 해방의 찰나이다. 참회의 순간이 비켜나면 나는 다시 또 좁다란 방구석의 어느 모퉁이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야만의 시대라고 입을 모아 누군가들이 지껄이듯, 더이상 당신들은 시를 쓰면 안되었다. 알량한 계몽주의자를 가장해서라도, 치기어린 자코뱅주의라 손가락질 받더라도, 혹은 상투적인 문학의 탈을 쓰고서라도, 이 모두가 허기져 견딜 수 없는 사태에 대하여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서정을 말하기 마련이다. 싸구려 멜랑꼴리의 수사로 자신을 질식사시킨 시체들이 널려있다. 가끔 나는 무엇을 부여잡아야 할지 몰라 절망에 휩싸인다.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릴 길이 없다.

- 그래서 이 서정을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호소하는 시를 읽고 있자면 어쩌면 이것은 키치의 시학을 우스꽝스럽게 비유한 것이 아닐까하는 못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키치가 '일상 생활의 물질적 환경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시인은 쾌적한 일상을 유지하도록 하는 내적 질서에서 배어나온 포스트모던한 멜랑꼴리적 서정을 나름 디자인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쩔수 없이 떠올리는 것이다.

-자신의 허기짐을 감각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야말로 그것을 우회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세계와 실재는 어떤 형식을 통해서 가시화되어야 하냐는 물음이 남는다. 키틀러를 인용하여, 더이상 글이 소리와 이미지의 심상을 그려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리고 상품화한 미디어를 위한 교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뿐이라면, 실종된 문학의 행방을 일상화된 키치를 경유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면 여전히 우리의 서정시가 존재하는 이유를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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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0. 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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