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마우스의 리믹스로 더욱더 유명세를 탄 i remember의 도입부와 비슷한(거의 같다) 곡이 수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전작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가기로 마음먹은 듯한 kaskade의 신보.
섣불리 도전을 감행하기가 힘든 것이 기존의 라운지 음악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kaskade의 서정적인
멜로디컬함은 그러한 실험정신이 가미되지 않아도 완벽하다.
우파 아나키스트라는 부류에 자신을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큰 영광일거라는 우엘벡의 발언은 공공의 적을 자처하는 한 무정부주의자의 지나친 솔직함이 배태하는 카타르시스 외에도 어떤 아이러니한 울림이 거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울림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결코 맞닿을 수 없는 수평선상에 위치한 두 기표를 함께 나열시킴으로, 자신은 양자에게 모두 유연한 태도로서 불화를 조율할 수 있다는 교묘한 위선을 가장했던 누군가의 초상을 뇌리에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사실인즉, 모든 새로운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조직과 프레임, 제도를 거부함과 동시에 권력의 외부에서 평등을 부르짖는 무정부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이 과연 합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바쿠닌과 프루동을 대처나 레이건, 부시 등과 한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러한 불일치하는 두 이데올로기를 모두 떠안음으로 생겨난 분열과 모순 외에는 어떤 식으로도 자기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우엘벡의 외곩수적인 기질에서 우엘벡식의 우파 아나키스트는 탄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68년도 5월, 유럽을 휩쓴 성의 해방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립이라는 변혁의 물결이란, 동물적이고 폐쇄적인 성 문화가 뿌리내리기 위한 젊은 층의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했으며, 이 명백히 자본주의스러운 운동은 점차 현대문명을 동물의 왕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이러한 퇴행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종교적 절대성을 호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68의 유산이라 일컬을만한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그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스러운 이념을 배아시켰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종 글쓰기가 고통인가 아니면 쾌락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씩은 이런 질문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답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느낌으로부터 생겨나는 뭔가 다른 것 말입니다. 어쨋든 극도로 신경질적인 흥분 아니면 곧 진력이 나는 기분의 고양이 그것입니다-
- 나의 글쓰기는 길 위에서 자전거를 달리게 하고, 심연을 스치기는 하되, 그렇다고 그 심연으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는 작업의 연속입니다. 정말 진저리 나는 직업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작업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우엘벡
-가장 정확한 사유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틈새, 빈터, 빛의 화살 속입니다!-
-문학인가, 삶인가? 문학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는 겁니다. 나에게 삶은, 내가 이 삶으로부터 언어를 끌어낼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심오하게, 그리고 육체적으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
-시니피앙의 창백한 모습, 말의 섬세한 짜임새 같은 것 - 레비
나의 경우, 글쓰기란 볼썽사납게 돋아나있는 감각의 촉수들을 마모시키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사정없이 절개된 문장 발밑으로 끝없이 쌓여있는 감각의 잔여물에 매몰되어 그저 잦아들고싶은 것 뿐인 충동이다. 글이나 언어로 극복되는 고뇌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성마른 단어들이 응결하는 그 짧은 순간에 찾아든, 형용불가능한 감정의 일회적인 해소에서 비롯한 미증유의 안식일뿐이다. 그 작업이 끝나면 고뇌는 다시금, 무한한 언어의 지평 위에 군림한다. 무의식중에 써갈겨간 텍스트를 읽는 것은 당시의 지난한 상황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다. 심화와 일시적인 해소가 반복되는 순환의 회로에서 이탈할 수 있는 경우의 수란 또다시, 있을 리 만무한 미래의 편린이다. 언어의 확실함만이 영원을 담보한다. 이것 외에,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