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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09. 11. 24. 01:26
..반대로, 푸른 하늘이라는 영역 속에서 세계는 그 어디에서보다 가장 비확정적인 몽상에 스며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몽상이 진정으로 깊이를 갖게 되는 것은 그때이다. 푸른 하늘은 꿈 아래 파여든다.[스스로 푸르게 깊어 간다]. 몽상은 평면적인 이미지를 벗어난다. 얼마 있지 않아, 역설적이게도, 공기적 꿈은 깊은 (수직)차원만을 그저 갖게 될 것이다. 회화적 몽상, 즉 그림으로 된 몽상이 펼쳐지는 다른 두 개의 차원은 몽상적 가치를 잃게 되리라. 세계는 그런 즈음 진정 박 없는 거울의 저 건너편에 있다. 그 세계는 차안이 없으면서도 상상적 피안을, 순수한 피안을 가지게 된다. 우선, 아무것도 없다. 이어, 깊은profond 어떤 무가 있다. 마침내, 푸른 깊이profondeur가 있다.

"푸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클로델적 송가는 대답하리라. "푸르름이란 눈으로 볼 수 있게된 어두움이다"라고.

..."낮과 밤 사이의 푸르름은, 항해사가 동방 하늘에서 모든 별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는 저 미묘한 순간이 입증하는 것 같은 그런 균형을 가르킨다."

"다양한 푸른 빛은 근본적이며 일반적인 그 어떤 것, 신선하고 순수한 그 어떤 것, 언어에 선행하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감싸고 또 적셔 주는 온갖 것에 부합한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여신의 옷자락이다."

"깊은 하늘을 본다는 것은 온갖 인상들 중에서 어떤 감정에 가장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것은 가시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아니 보다 더 잘 표현하자면 감정과 보는 것의 결정적인 융합이며 완벽한 결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융합은 어떤 사람의 더운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한 세계에 필적한 열정을 가지게 될때 느끼는 열감에서 벗어난 바로 그런 융합이다. 그것은 대지적 가슴, "셀 수 없이 여러 모습을 지닌 가슴" 이 형태와 색의 무한 풍부함을 마주 대하고 경탄할 때 갖게 되는 풍요의 인상들이란 무게가 덜어져 나간 기화이다"

-공기와 꿈, 가스통 바슐라르

이따금씩 참을 수 없어지면, 그러니까 의지와 쳠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그것이 결국엔 이성을 넘어선 후의 참상을 수습하기 위해 그 허물어진 경계의 철조망을 보수하고자 할 때는 이 책을 읽는다. 공기의 운동, 하늘, 구름, 몽상, 빛과 어둠, 별자리와 성운을 말하는 이 아름다운 언어들의 태피스트리를 읽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나는 지식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 안다. 진실이 세계를 해독할 수 있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만일 내가 진실을 안다면 변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나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쨋든 내게는 둘 다 마찬가지다."  

세계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폭풍이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 위의 나약한 나룻배마냥, 종말을 향한 역사의 진행에 우린 저항할 수 없다. 물론 항간의 음모론처럼 3년 후에 목격하게 될 지구멸망의 미래같은 종류의 드라마틱한 종말이 아닐지더라도, 우리의 무의식 언저리에 묵시록은 다양한 양식의 내러티브로써 이입되어있다. 아마도 이러한 메커니즘의 근원은 제임슨과 지젝이 말했듯이 지구의 종말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끔, 푸코가 살아있다면- 노인성 치매에 걸리기 쉬운 나이일테지만-현재의 세계에 관하여 어떤 식으로 사유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반시대적인 인간의 표상과도 같은 그의 성향 상, 그의 친구 폴 벤느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처럼 사무라이의 정신으로 저항과 투쟁을 말하거나, 혹은 니체식 회의주의자의 전범으로서 분열된 주체의 시각으로 진리없는 세계, 잠재적인 전쟁터로서 정당성을 잃은 세계의 미래 따위가 중요할게 뭐냐고 주창하지 않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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