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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from 짧은말 2012. 2. 10. 13:08







                           
                               “우리는 항상 2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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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적 세계관의 결말이 언제나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 이 양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근대의 합리주의가  발전시킨 이 뉴타입의 탄생은 파열음이 없는 완전한 세계를 예고한다. 여기서 모든 적대와 폭력과 불화는 이미 근본적으로 지양되어 있다. 균열과 노이즈가 없는 세계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역사가 끊임없는 투쟁의 변증법적 운동이라고 정의할때, 모든 불화가 합의된 세계는 이미 종결된 세계, 진보의 조건이 부재한 세계가 된다. 모든 모순이 무화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탄생시켰을 때, 나는 우엘벡이 이러한 역사의 진행에 대하여 이미 깨우치고 있었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어설프게나마 도킨스류의 우스꽝스러운 유전공학적 방법론을 채택하여 인류의 종말을 고하고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신학적 도식을 차용하여 곧 도달할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적대와 공존하는 세계를 혹은 미래의 역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종교적 기원회귀에 대하여 교묘하게 설파하는 입장으로 우회해버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인류의 유전공학적 주조는 과학의 가시적인 발전을 이룩한 오늘날에 와서야 쓰일 수 있는 우엘벡의 문학적 장치로서 기능한 것이라는 얘기지, 우엘벡 자신이 이 다윈주의자들의 과학을 신뢰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종교란 다른 무엇이기에 앞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만일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어떤 시도가 합리적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요구와 상충한다면, 그 시도는 성립될 수 없어. 수학적 증명이나 실험은 인간의 의식이 획득한 돌이킬 수 없는 권리야. 그걸 포기할 수는 없지."

- 스스로 성차를 제거해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버틀러식의 전복에 준거하여. 생물학적으로 여전히 여성이지만 멘탈에 있어서는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나 스스로 정의해버린 것에 대해서. 그녀 말대로 젠더가 부차적인 문화와 관습에 의해 구성된 인공물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것일까? 젠더의 일차적 외피를 걷어냈을 때의 나는 누군가를 매료시킬만큼 데카당스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치열하게 학문의 길을 연마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안겨줄만큼 모범생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게으름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노력해왔을 뿐이다. 이에 대하여 너에게 묻는 일은 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여튼 점점 더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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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2. 29. 17:47

 




-모두가 허기진 세계. 적막한 귀가길, 골목을 밝히는 허름한 네온사인에도 매달리고 싶어지는 기분으로,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검고 푸른 물 밑에 잠긴 너를 떠올리는, 잠들기 전의 짧은 몇 분 가량의 시간은 해방의 찰나이다. 참회의 순간이 비켜나면 나는 다시 또 좁다란 방구석의 어느 모퉁이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기분으로 살아야 했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야만의 시대라고 입을 모아 누군가들이 지껄이듯, 더이상 당신들은 시를 쓰면 안되었다. 알량한 계몽주의자를 가장해서라도, 치기어린 자코뱅주의라 손가락질 받더라도, 혹은 상투적인 문학의 탈을 쓰고서라도, 이 모두가 허기져 견딜 수 없는 사태에 대하여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서정을 말하기 마련이다. 싸구려 멜랑꼴리의 수사로 자신을 질식사시킨 시체들이 널려있다. 가끔 나는 무엇을 부여잡아야 할지 몰라 절망에 휩싸인다. 다른 이름을 입에 올릴 길이 없다.

- 그래서 이 서정을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호소하는 시를 읽고 있자면 어쩌면 이것은 키치의 시학을 우스꽝스럽게 비유한 것이 아닐까하는 못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키치가 '일상 생활의 물질적 환경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때, 어쩌면 이 시인은 쾌적한 일상을 유지하도록 하는 내적 질서에서 배어나온 포스트모던한 멜랑꼴리적 서정을 나름 디자인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어쩔수 없이 떠올리는 것이다.

-자신의 허기짐을 감각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야말로 그것을 우회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세계와 실재는 어떤 형식을 통해서 가시화되어야 하냐는 물음이 남는다. 키틀러를 인용하여, 더이상 글이 소리와 이미지의 심상을 그려낼 수 없게 되었다면, 그리고 상품화한 미디어를 위한 교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뿐이라면, 실종된 문학의 행방을 일상화된 키치를 경유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면 여전히 우리의 서정시가 존재하는 이유를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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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10. 1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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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9. 27. 08:14




-추문을 폭로하고 죄악의 단죄를 촉구하는 일은 어느새부턴가 예술의 책무가 되어버린 듯 하다. 폭력의 즉각적인 현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대중의 계몽을 영화는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시각화된 스펙터클을 목격한 후 '계몽된' 주체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면서 소리높여 항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이런 추문이 과거 언론에 의해 공표된 적이 없었으며 자신들의 무지함은 언론의 은폐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당연하다는 듯이. 잔혹함의 비전은 가히 근대성의 병리적 현상이라 불릴만한 개인주의적인 모종의 합의에서 탄생했다. 반인륜적이며 반인도주의적인 추문의 원환은 사회의 이탈자들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이탈자들이 저지른 범죄와 사회의 건전한 일원인 나 개인은 전혀 관계된 바가 없다는 인식이 관념화된 상태에서 일상의 처참함이 타전된다. 그리고 진보한 자유민주주의의 사회에서 이러한 추문이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을 개시한다. 왜 이 땅은 영화를 부조리를 고발하는 매개쯤으로, 그리고 그것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을 수반하는 것처럼 조명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수년이나 지나서, 피해자의 상처를 헤집으면서까지 자신의 도덕적 자명함을 정립하려 발버둥치는 것인가.

-여전히 그의 글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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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9. 23. 12:38

 


- 흡사 인간이 쏘아올린 별 마냥 빛을 발하며 우리 머리 위를 떠돌던 인공위성이 우주 폐기물이 되어 지구로 추락하는 중이라는 뉴스가 21세기에는 그 어떤 픽션보다도 낭만적이다. 오늘날 우주의 소멸과 파국, 종말을 의미하는 언어만큼 아름다운 서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파국은 이후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한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어떤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품는 기대감만큼이나 세계의 끝은 너무나 찬란하고 매혹적인 외양을 지닌다. 이 21세기식 세계의 끝은 더이상 시인의 언어나 희곡 등을 빌어 현전하지 않는다. 대개는 영화 판의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로 재현되지만 실제로는 나날이 몰락해가는 경제지수나 평온을 가장한 보이지 않는 폭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식자들에게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도록 할 뿐이다. 현대의 낭만이 주조되는 양식은 실존의 영역이 분쇄되는 과정에서 비롯한다. 스크린 너머의 파국을 감상하는 안락함의 자세야말로 낭만을 즐기기 위한 메뉴얼의 첫번째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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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9. 20. 23:48





- 오늘날 트렌드의 기수가 되는 일은 실로 역사적 인간에 한걸음 다가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시각각 타전되는 뉴스와 이슈에 귀기울일 줄 알고 요즘 잘나가는 책이 무엇인지 정도는 꿰뚫고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트렌디한 교양인으로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 시대의 교양인은 바로 유행에 능숙한 이들을 정의하는 개념이다. 현대인들은 유행을 체감하는 것으로 사회와 관계맺고 있다는 인식을 구축하게 된다. 마르크스의'불구화한 인간'은 생을 영위하는 방법론적 태도로서 재전유되고 있다. 여전히 당신이 사회적 인간일까 하는 물음에 사로잡혔다면 가장 손쉽게 내놓을 수 있는 실질적인 해답이란 유행하는 최신 전자기기와 의류를 구입하고 오픈된 공간에 나를 전시하라가 될 것이다. 삶의 모든 가치를 보편적 허위를 구가하는데 중점을 두는 사람은 그야말로 유행의 첨병이며 동시에 더할나위 없는 사회의 착실한 구성원인 셈이다.

- 이제 화요일이 지났을 뿐인데 고단함이 절정에 다다른 목요일같다. 항상 허덕이는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가끔 창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새벽의 푸르름이 방안을 잠식하는 그 순간을 호흡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순간과 " the sea of memories "라는 pallers의 앨범 제목은 분명히 닮아 있다. 가장 인상 깊은 곡을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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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9. 11. 18:54





- 더이상 전통이 유의미한 것이 아니게 되버린 한국에서 -건축의 생태계를 떠올려보라. 오래된 것은 재개발되어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대상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 민족은 역설적이게도 일년에 두어번 도래하는 명절을 사라지는 전통의 정기를 조금이라도 고취시키고자 하는 시간으로 삼는다. 하지만 실상 이 시간은 서로에게나 고통만 가중시키는데 급급한 최악의 시간인데도 모두가 이 명절을 기념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나누는 것으로 이들은 몸 속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명절에 근친살인과 폭력이 자행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 우엘벡은 단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의 고독을 타이핑하는 것에 매진하지 않는다. 그의 고독은 만연한 인간소외와 도착적 페티시즘을 빌어 현현한다. 이 물신과 소외를 배양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엘벡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뒤늦게 혹은 마지못해 수여된 공쿠르는 일찍이 우엘벡의 세계관이 집약된 <소립자>에 주어졌어야 할 영예였다. 
 그는 새로운 소설 <지도와 영토>에서 아도르노식 제스처로 암약하는 자신, 미셸 우엘벡을 등장시킨다. '미셸 우엘벡'과 주인공 '제드'는 소설이며 사진이며 회화며 비디오아트며 예술이라 참칭되는 모든 매체가 일개 공산품으로서 소모되는 사회에 대한 메타포다. 그렇다면 우엘벡은 이제는 너무나 상투적인 수사에 불과하게 되어버린 이 문화산업 내에서의 자본과 예술의 공모관계를 폭로하려는 프로젝트의 일원이 된 것인가? 모든 가치가 일회적인 공산품으로서 전화해버린 사회에서는 하등 예술조차도 그러한 운명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만이 온전한 진실이다. 사상과 언어는 계속해서 대체될 것이다. 또한 이후에, 더이상 사회에 화폐가치라는 물신이 부재하게 되더라도 또다른 형태의 물신은 연속적으로 도래할 것이다. 사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물신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 읽은 후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 짧고 명확한 의사전달을 종용하는 sns에서 나의 고독과 취향을 만 천하에 전시해봤자 그것은 그저 추문에 불과한 일이다. 때문에 sns를 더이상 이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 여파로 블로그 사용이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의 게으름이다. 무엇보다 소화하는 텍스트의 분량, 딱 그만큼이나 나는 점점 더 사유하는 인간과 거리가 먼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더이상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는 인간은 섣불리 말하자면, 학문을 할 수 없다. 사유가 언어적 판본으로서 생산되는 것이 불가능한 때. 어쩌면 내게 필요한 그 무엇은 차라리 어떤 강제적 개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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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의 신간

from 짧은말 2011. 9. 7. 17:50



블랑쇼에게 카프카란 존재가 있었다면, 내게는 우엘벡이 있다고
감히 말한다. 손꼽아 기다린 이 책을 방금 주문했다. 세계의 모든 것을 우회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그의 소설에서 사태의 촉발은 사실 '죽음'에서 기원한다. 염세와 허무로 얼룩진 인간의 욕망과 이 욕망을 파생시키는 자본주의적 현실태와 더불어 그의 전 작품을 지배하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죽음'이다. 극 중의 모든 인물들은 이 '상실'을 견디기 위한 신경증을 앓는다. 그리고 우엘벡은 택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이 정경을 소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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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짧은말 2011. 8. 28. 17:30








불꽃 아래 재처럼 누우면서 나는 단념했다.
아니다. 나는 잔다. 그리고 밤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깨어나리라는 것을 어린 아이처럼 배운다.
-폴 엘뤼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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